Iksan Holy Land – View historical s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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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전대각전은 중앙총부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 언덕에 세워진 건물로 교단에서 제일 처음 현대식 건물로 지은 대집회를 위한 건물이다. 원기 19년 정기 총대회에서 기념관 건축의 안이 발의되었다. 김기천의 제안으로 기념관 건축 기성위원회가 조직되어 유허일, 이공주를 남녀 중앙위원장에 추천하고 건축성금은 권장한다든지 하는 방법은 없도록 하고 반드시 교도의 자발적 희사를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원기 20년(1935년) 새해부터 복숭아밭이던 터를 닦기 시작하였으며 4월 총대회를 기하여 완공하였다. 대각전 전면 중앙에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인 불성 일원상을 이곳에 최초로 봉안하였다. 일원상 봉안의 초기 교단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일원상을 조그만 나무판에 새겨 모시고 아래 종서 2행으로 사은지본원 여래지불성(四恩之本源 如來之佛性)이라 새긴 위패를 모셨다. 일원상이 봉안된 곳은 지금처럼 높은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닦에서 30cm정도 높은 단상으로 되어 있었다. 불단 옆에 있는 법좌는 대종사 생존시 대종사가 앉아 법을 설하신 법좌가 놓여 있다. 대각전의 현판 글씨는 강암 송성룡선생의 부친인 송재호 선생의 글씨이다. 이곳을 지을 당시는 84평이었으나 원기 39년(1954년)까지 두 차례의 증개축을 통하여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대각전 불전 앞의 마루를 보면 증축을 한 흔적이 보인다. 이 대각전이 증축됨으로 해서 이제까지 공회당에서 행해졌던 예회나 선 등을 이곳에서 하게 되었다. 이곳이 건축될 당시에는 인근뿐 아니라 시내에서도 이처럼 큰 집회장소가 없을 정도로 큰 건물이어서 촌노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구경올 정도였다고 한다. 원기 71년(1986년) 5월 2대말 성업봉찬사업회에서 대각전 주위에 황등석을 깔아 주위 조경을 했다.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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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송대는 중앙총부 북편 소나무 숲속에서 지어진 집으로 옆에는 대종사 성탑과 성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구전에 의하며 원기 26년 가을에 대종사가 휴양과 집필을 위하여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3칸 겹집으로 당시 조실이나 공회당(상주선원)에서 멀리 북쪽으로 떨어진 소나무 숲사이에 세워졌다. 한때는 주요 환자들의 간병실 역할도 하였다. 원기 34년 2월 정산종사의 유시를 받아 교단 기관지인 월간 원광(圓光)이 창간된 산실로 이곳에 원광사(圓光社) 현판을 걸기도 하였다. 정산종사는 일제 말기에 자진 휴간된 <회보>를 계승할 교단 기관지 발행을 염원하고 시봉금 약간을 하사하면서 유일학림 졸업생 이은석, 이공전에게 원광지 창간을 독려하였다. 정산종사는 34년 7월 원광 창간호에 [일원지광 편조시방(一圓之光 遍照十方)]이라는 휘호를 내렸다. 이어서 무엇이나 진실한 일은 아무리 없애려 해도 필경은 있어지는 것이요, 거짓된 일은 아무리 있으려 하여도 필경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라고 교단의 영원한 장래와 아울러 원광도 영원하도록 축원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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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성비소태산 대종사의 생애와 업적을 길이 추모하고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원기 38년(1953년) 4월, 제 1대 성업봉찬사업의 하나로 세운 비석이다. 중앙충부 소태산 대종사 성탑 동남편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문에는 대종사를 찬양한 내용이 있는데 이는 정산종사가 지었다.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 비명병서 圓覺聖尊 少太山 大宗師 碑銘幷序 대범, 천지에는 사시가 순환하고 日月이 代明하므로 만물이 그 生成의 道를 얻게 되고 세상에는 佛佛이 繼世하고 聖聖이 相傳하므로 중생이 그 제도의 은을 입게 되나니 이는 우주 자연의 정칙이다. 옛날 靈山會上이 열린 후 政法과 像法을 지내고 季法 시대에 들어와서 바른 도가 행하지 못하고 삿된 법이 세상에 편만하며 정신이 세력을 잃고 물질이 천하를 지배하여 생령의 고해가 날로 增深하였나니 이것이 곧 救主이신 대종사께서 다시 이 세상에 출현하시게 된 기연이다. 대종사의 성은 朴씨요 휘는 重彬이요 少太山은 그 호이시니 釋尊紀元 2918년 辛卯 3월 27일에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탄생하시었다. 父는 朴晦傾 母는 劉定天이시요 新羅始祖王와 朴赫居世의 후예이시다. 대종사 유시로부터 기상이 늠름하시고 도량이 웅대하시며 모든 사물에 매양 사색의 정신이 많으시고 한번 하기로 한 일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반드시 실천하는 용단력이 있으시었다. 9세시에 우주의 자연 현상을 보시고 큰 의심이 발하시었으나 그 억頭를 풀기로 한즉 생각이 막연하여 도저히 究竟處를 해득하기가 어려우매 대종사의 우울하신 심경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시사 처음에는 산신에게 다음에는 도사에게 의뢰를 구하여 보시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필경은 晝宵一念이 오직 한 의심뿐으로 점점 計較頓忘하는 三昧의 경계에 드시시었으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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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종사성탑원불교 교조 소태산 대종사의 법통을 계승한 정산종사는 원기 47년 열반하여 그 성해를 다비한 후 송대에 임시 봉안하였다. 원기 56년 10월 7일 정산종사의 공덕을 기리고 생애를 추모하기 위하여 개교 반백년기념사업 중 하나로 정산종사 성탑을 영모전 서쪽, 현 소태산 대종사 기념관 입구 자리에 건립하고 탑신에 성해를 봉안하였다. 그러나 개교 반백년 당시에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던 관계로 성탑을 뜻과 같이 모시지 못한 아쉬움과 성해를 모시어 후대에 남길 만한 역사성, 상징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원기 71년 3월 성업봉찬회에서 탑의 보수보다는 다시 건립키로 결의하였고 이를 수위단회에서 승인받아 탑의 건립부지를 대종사 성탑 동쪽 현 성탑 위치로 확정하였다. 이어 탑의 형태에 관한 몇 가지 안을 수차례 검토한 결과 전통양식의 탑으로 봉건할 것을 결의하여 원기 73년 6월 5일 기공하여 10월 15일 옛 성탑을 해체하고 10월 20일 정산종사 성해를 옮겨 봉안하고 성탑과 주변공사를 마무리 하여 11월 5일 중공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옛 성탑은 학림사 뒷편으로 방치되어있다가 뜻있는 사람들에 힘입어 원광선원으로 옮기어 복원 건립하였다. 비명은 "대종사는 하늘이시오 태양이시라면 정산종사는 땅이요 명월이시며 대종사는 우리의 정신을 낳아주신 영부라면 정산종사는 그 정신을 길러 주신 법모시라..."라며 대산 종법사가 지었으며 탑 뒷편 조각은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만남 정산종사의 게송인 삼동윤리(三同倫理)사상을 형상화 한 것이다. 탑 중앙 원석(圓石) 속에 성해(聖骸)가 모셔져 있다. (1) 화해제우상(花海際遇相) 원기 3년(1918년)스승을 찾아 길을 떠난 정산종사가 정읍 화해리 김해운의 집에 잠시 머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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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모전중앙총부의 확장된 구역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영모전은 대종사 이하 역대 선영 열위의 법은을 영원히 사모하기 위하여 위패와 역사를 봉안한 묘우로써, 원기 56년 9월 개교 반백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건축되었다. 개별위패를 봉안하지 아니하고 공동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본좌는 대종사 위를 비롯 재가, 출가의 역대 선영 열위를 봉안하고, 왼쪽 별좌는 희사위와 일반 부모 선조위가 봉안되어 있고, 오른쪽 별좌는 선성위와 일체생령위를 봉안하였다. 처음 영모전에는 일원상이 봉안되지 않았었다. 그러자 신앙의 본존이 있어야 할 중앙총부의 중심위치에 사당인 영모전이 자리하고 있어 제사 위주의 종교로 오인될 염려가 있고, 총부의 주요 야외행사시 법신불을 향하여 의식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사당을 향하게 되며, 영모전 앞 내왕시 참배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게 되었다. 또한 총부의 대표적 건물로 영모전이 소개되며, 내빈들의 참배 대상 및 구역이 명확, 편리하지 못한 점 등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제기되고, 수차례 영모전을 법신불을 모신 본전으로 개조하여야 한다는 의견에 높아졌다. 이에따라, 본래의 위패를 설위한 불단에 일원상을 봉안하고 본좌와 별좌를 구분한 불단으로 개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단에서는 매년 6월 1일과 12월 1일에 정기적으로 향례를 올리고 있으며 교단의 큰 행사와 사업의 시종을 고하는 의식을 올린다. 건물양식은 석축을 쌓은 누대 위에 시멘트 현대식 건물로 지붕은 청기와를 얹은 반쪽 지붕으로 한국 건축의 곡선미와 서구 건축의 웅장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건물은 건축 당시 한국 건축심사에서 장려상을 탄 건물로 지붕의 건축양식이 특이하다. 또 건물 앞에는 잔디의 넓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