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ongsan Holy Land – View historical s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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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동 집터구호동 집터는 영산 출장소에서 서남쪽으로 약 1Km 가량, 탄생가에서 약 0.6Km 떨어져 있는 곳으로 노루목에서 마당 바위로 가는 길목에 있다. 동네 이름을 구호동이라 한 것은 주위를 둘러싼 산세가 흡사 아홉 호랑이가 버틴 형세라 해서 구호동(九虎洞이라 하기도 하고 구수산에 살고 있는 호랑이가 이 골짜기로 잘 드나 들은 데서 구호(口虎라기도 하며, 또는 예전부터 있던 동네라서 구동(舊洞이라고도 한다. 이 곳에서 대종사가 15세부터 20세 되던 해까지 유년 시절을 보내신 곳이며, 영촌 탄생가와 같은 4간 겹집(방 두칸, 부엌과 광, 외양간이나 탄생가보다 훨씬 잘 지어진 집이다. 또 15세 때 이 곳에서 부모님의 명에 의해 전남 영광군 백수면 홍곡리 장기촌의 규수 제주 양씨(양하운 대사모님와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 19세 되던 해, 1월 23일 (음 1월 2일 에는 장녀(박길선: 주산 종사 부인를 얻어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한편 1910년 11월 30일(음력 10월 29일 대종사 20세시 부친 박성삼옹께서 별세하자 심적 변화를 일으켰던 곳이기도 하다. 한편 대종사는 전일에 산신령을 만나고자 했던 결심이 이 곳 구호동 집에서 도사를 만나려는 계기로 이루어진다. 대종사 결혼한 이듬해 (1906 1월 말경 새해 인사차 장기촌 처가에 갔다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고대소설 조웅전(趙雄傳과 박태부전(朴太簿傳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내용은 주인공이 도사를 만나 공부한 결과 탁월한 정신력을 얻어 소원을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종사는 전일의 생각을 돌려서 구사고행(求師苦行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도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진 구호동 집은 구호동 일대가 6. 25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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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 탄생가구수산의 한 줄기가 안으로 감아 돌며 마치 코끼리 형상의 상여봉을 이르고 이어 힘차고 아담하게 한 봉우리로 솟아 있는데 마치 처녀가 곱게 머리를 땋아 내리고 촛대봉에 불을 밝히고 글 읽는 모양이라 하여 옥녀봉이라 한다. 또한 이 산을 성인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법성포를 바라보고 있다하여 망성봉이라 하기도 한다. 옥녀봉과 상여봉을 뒤로 하고 남양받이에 십여 호의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여기가 대종사가 태어난 영촌마을이다. 상여봉의 지맥이 옥녀봉에 이어지면서 한 줄기 남으로 뻗어 내리는 곳에 대종사가 탄생한 집터가 자리하고 있다. 한말의 풍운이 휩쓸던 1891년 5월 5일(고종 28년 신묘년 음 3, 27 원불교를 창건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는 아버지 박성삼공과 어머니 유씨(법명 정천의 3남으로 탄생하였다. 어릴 때의 이름은 진섭이라 했고, 이 곳에서 14(1904세까지 성장하면서 대각의 관건이 된 우주와 인간의 근원에 관한 의문을 내신 관천기의상을 나툰 곳이다. ‘구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왜 친한가?’,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등으로 시작된 의문은 점차 진리에 대한 큰 의문으로 뭉쳐졌고 그러한 의문들을 풀기 위해 집에서 4Km 떨어진 구수산 줄기 험준한 산중턱 삼밭재 마당바위로 산신령을 만나기 위한 기도를 다니면서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대종사 11세(1901년때 여름, 영촌 마을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범람하여 온 동네가 물에 잠기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산 밑에 있는 대종사의 집도 침수되어 이사가기로 작정하고 구호동에다 새 터를 잡고 집 지을 준비를 하게 되었으며 대종사 15세(1905되던 해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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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밭재 마당바위삼밭재는 구호동에서 구수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로 마전령(麻田嶺이라 전하기도 하고 삼령(參嶺이라 하기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나 옛 지도에 베짜는 삼밭을 뜻하는 삼전(參田으로 표기되어 있고 마을 사람들은 산삼이 있었다는 전설에 의해 삼전을 뜻하는 삼밭재라 하기도 하다. 이곳은 일명 개미절터라 하는데 가야암이 개아미절로 변음 되다가 개미절터라 부른 듯 하다. 지금도 이곳엔 기와 파편 등이 흩어져 있고 여기저기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고 넓은 바위가 있는데 크기가 시골집 마당 하다하여 마당바위라 부른다. 탄생가에서 서쪽으로 4킬로미터로 떨어진 구수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종사가 소년시절인 11세 늦가을부터 15세까지 만 4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산신을 만나기 위해 기도를 올린 바위로서, 마당바위 가는 길은 탄생가에서 독다리(영촌과 구호동 사이에 있는 작은 부락를 지나 구호동 뒤 골짜기를 타고 개암골로 들어가면 큰 정자나무 샘터가 나온다. 큰 정자나무 옆에 샘터는 비교적 양지바르고 아늑한 곳으로 대종사 20세시 무렵부터 의식을 돈망하는 때가 많아 주위로부터 폐인의 취급을 받을 때, 구호동에서 살던 부인 양씨는 이 샘터에서 대종사를 위해 지극한 정성을 모으기도 했던 곳이다. 11세 되던 가을 아버지를 따라 선영의 묘소가 있는 군서면 마읍리에 시제를 모시러 갔다가 산신제를 지내는 것을 보고 어른들께 여쭈어 산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집에 돌아온 대종사는 산신을 만나서 사람들이 모르는 모든 문제를 알고 소원을 성취하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대종사는 산신제의 장소를 마당 바위로 정하고 서당에 간다 하고는 삼밭재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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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포선진포 입정터는 영산 출장소에서 산길로 와탄천을 따라 1Km쯤 가면 바위옆에 큰 정자나무가 서 있는 나루터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 바로 대종사가 구도시절 영산에서 법성장에 가다가 반나절이나 입정 상태로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집도 없고 나룻배도 없이 비석 하나만 서있지만 옛날엔 입암동을 건너 법성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였고, 짐을 운반하는 큰 배가 드나드는 포구로 일제 때만 해도 일본인 지주들이 선자를 거두어들여 군산이나 목포로 운반할 때는 이곳을 이용하는 곳으로, 영광지방의 곡물과 특산물을 실어 나르는 포구로 주막과 창고가 4동이나 있는 상당히 큰 포구였으며, 이 곳 선진나루는 길룡리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옛날에는 길룡리에서 읍내로 나가려면 산길 소로를 타고 백두계재를 넘어 만곡에서 영광이나 백수로 가거나, 선진포를 건너 입정리를 돌아 법성으로 나가게 되었다. 더러는 4Km쯤 산길을 걸어 한시랑이로 가서 구수미나루를 건너 법성에 가기도 하나 대부분 선진 나루를 이용하였다. 행정구역으로는 백수에 속하나 길룡리 뿐만 아니라 장산리, 구수리 사람들은 물 건너 법성이 물자도 풍부하고 내왕하기도 편리하여 법성을 이용하였다. 지금은 영광읍과 길룡리를 잊는 도로개설로 나루터 흔적만 남아 있다. 대종사는 20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하고 망극의 슬픔 속에서도 의심은 더욱 큰 무게로 가슴을 누르니 ""장차 이일을 어찌할꼬""하는 절망감 속에 가끔 골똘한 생각에 잠기면 모든 의식을 놓은 듯 정에 빠져들곤 하였다. 하루는 법성장에 간다고 선진포에 나가서 나룻배를 기다리다가 그대로 정에 들어 버렸다. 한나절이 지나 장에 돌아오던 동리 사람들이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대종사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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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영바위대각지에서는 동남쪽으로 300미터쯤 가면 큰 팽나무, 귀목나무들이 아름드리 거목으로 서 있고 숲에 둘러싸여 있는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귀용의 형상이라 해서 귀룡바위인데 바람들이 부르기는 귀영바위라 한다. 대종사는 가끔 이 바위 안에서 정에 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영산 성지를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사적지로 현재 영산성지 고등학교 앞 길가 정자나무 아래에 있는 큰 바위 밑에 그 집이 있었다. 이 바위 아래 조그마한 초가에서 대종사는 22세부터 23세를 전후하여 살았다. 20세시 부친의 별세로 인해 대종사는 커다란 충격과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때까지 생활에 대한 책임이 없어 구도에만 전념할 수 있었으나 아버지의 열반으로 인하여 늙으신 모친과 처자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며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신 관계로 부친 생전에 정리하지 못한 채무를 상환하여야 하는 일들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 계실 때부터 대종사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비로소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영광읍, 법성포, 무장 등지의 5일장에 나가 장사도 하였다. 하지만 빚 독촉에 계속 시달리자 귀영바위에 살면서 부친과 아주 절친한 김성서씨는 그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방안이라는 것이 주막을 차려 돈을 벌어 빚을 갚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귀영바위 앞터는 당시 흙을 파다쓰고 푹 꺼진 땅이라는 뜻으로 [흙구덩이 터]라 하는데 이 흙구덩이 터는 법성포나 구수미로 가기 위해 강변나루로 가는 길손이며 선진포로 가는 길손들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이원화 할머니를 만나 같이 장사를 하는 것도 바로 이곳이다. 영광 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