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성지-사적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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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종 사 성 탑원불교 교조이신 소태산 대종사의 위업과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탑으로 소태산 대종사의 성해(聖骸)가 모셔져 있다. 원기 28년 대종사의 열반 후 제자들이 대종사의 성해를 유리관에 모셔 보존코자 하였으나 일경들이 성인들의 이적을 두려워하여 화장토록 함으로서 장례식도 성대히 치르지 못하고 성해를 조실에 안치하였다가 49재 후 북일면 금강리 공동묘지인 상하묘지에 안장하였다. 그 후 6년이 지난 원기 34년 4월 25일에야 중앙총부 구내에 성탑을 조성하고 이안 하였다. 황등 화강석으로 조성하여 연화를 양각한 기단 위에 연화 대석을 받치고 구석(球石)을 올려 그 안에 성골을 봉안한 후 5층 탑신과 개석을 쌓고 [대종사 성탑]이라고 각명하였다. 대종사 성탑과 성비는 봉건 당시 경제 사정과 6·25 동란 등으로 성탑, 성비 주위의 석물공사와 경관 조성이 미비하였고, 세월이 지날수록 지형과 수림이 변화함에 따라 교단 창립 제 2대말 성업봉찬회에서 '대종사 성탑 장엄공사'를 필수 사업으로 선정하고 대종사 십상(十相)과 친필, 게송(偈頌) 부조를 장엄하였다. 대종사 십상 (1) 관천기의상(觀天起疑相) (2) 삼령기원상(蔘嶺祈願相) (3) 구사고행상(求師苦行相) (4) 강변입정상(江邊入定相) (5) 장항대각상(獐項大覺相) (6) 영산방언상(靈山防堰相) (7) 혈인법인상(血印法認相) (8) 봉래제법상(蓬來製法相) (9) 신룡전법상(新龍轉法相) (10) 계미열반상(癸未涅槃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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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부원기 9년(1924년) 9월 총부 건설 당시 본원실(일명 도치원)과 함께 최초로 지어진 집이다. 건립 당시 [ㄱ]자형으로 5간 초가 홑집이나 뒤에 함석을 올리었다. 총부 건립 당시 간고한 생활의 방편으로 엿장사를 하였는데 이 집에서 엿 곱는 일을 하여 [엿집]이라 하였으며 곡주형집이라 [꼭두마리집]이라고도 했다. 원기 10년(1925년)6월 엿방은 페하면서 식당과 사무실 그리고 여자 숙소를 겸하여 사용하였고 후에 본원실의 조실(서아실)이 금강원으로 옮겨졌으므로 사무실이 본원실로 옮겨졌다. 원기 16년경 다시 사무실(구정원)을 신축하여 옮김에 따라 [부인선원(여자선방)]으로 사용하기 위해 담장을 신설 개수하였다. 그후 여자 숙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원기 58년 중앙 선원이 발족됨에 총부내 세탁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통칭 [세탁부]라고 불렸다. 본래 엿방 건물은 18.5평정도로 10간 이었다. 그러나 60여 년의 세월 동안 건물이 퇴락하여 보수가 불가피했고 인접한 국도의 확장으로 세탁부로 쓰이던 엿방 건물은 본래보다 3간이 헐려 훼손이 심하였고, 대종사가 대중과 같이 거처하던 당시와 같이 복원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하지만 인접 국도가 확장되어 원래 위치에 10간의 건물을 복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8간으로 줄이게 되었으며, 담장과 일정한 간격을 두게 되어 한편은 건물 폭이 좁혀지기도 하였다. 원기 70년 6월 요양원 신축부지의 소나무를 벌목 가공하여 기둥과 서까래로 사용하고, 일부는 증기건조목을 사용하였으며 가능한대로 원래 목구조 형태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외벽은 흙벽에 백화를 바르고 실내는 단열재, 합판 위에 벽지로 마감하였으며, 지붕은 함석을 이어 페인트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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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실총부 건설 당시인 원기 9년 (1924) 9월에 최초로 지어진 건물이다. 11월 경에 완공하여 불법연구회의 첫 사무소를 설치하고 서중안 회장의 글씨로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란 이름을 기둥에 걸어 처음으로 세상에 공포하였다. 이 최초의 회관을 [도치원(道治院)]이라 칭했는데 대종사가 도치고개의 도치(盜治)란 이름을 고쳐 도치(道治)라 하였다. 이 도치에 세워진 신축 회관을 도치원(道治院)이라 하여 어둡고 미망한 과거 그 오명의 땅 이름에 다시 새로이 얼을 불어 넣어 바른 도로써 다스리겠다는 포부를 이 건물 명에 부여했던 것이다. 이 건물에는 방이 셋 있었는데 서아실은 대종사가 사용하는 [조실]이라 하였으며, 동아실은 팔산 등 5, 6명이 객실과 겸하여 사용하였다. 그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방은 교감실로 사용하여 정산종사가 기거하였다. 이곳에서 엿을 만들었으며 엿 목판을 잃었던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4간 겹집이었으나 동아실을 들여서 6간 겹집이 되었다. 원기 12년 경에 금강원을 지어 그곳으로 조실을 옮겼으며 원기 17년(1932) 8월에 앞벽을 트고 유리 창문을 달았다. 그 후 사용하면서 북쪽에 부엌간을 중축하고, 건물 좌우의 uFFFDE마루가 다소 변경되었으며 앞쪽 마루에 출입미서기문을 달았었다. 그러나 복원하면서 부엌간은 없애고, 본원실 건축 당시 부엌, 반청으로 쓰였던 곳도 방으로 하였으며 앞쪽마루도 폭을 4자로 넓혔다. 그리고 좌우 북쪽에 uFFFDE마루를 달았다. 기둥, 보, 서까래 등 주요 구조체는 외송을 증기 건조하여 원래 목구조형태를 실측 그대로 맞추었다. 본래 초가로 계획하였던 지붕은 유지관리를 고려하여 시멘트 기와를 얹었다. 또한, 엿방과 본원실의 관리를 위하여 17평 정도의 시멘트 벽돌 조적조 관리등을 본원실의 서쪽에 신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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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원대종사는 변산 봉래정사에서 교법을 제정하신 후 원기 9년 (1924년) 9월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에 교화기지를 중앙 총부를 건설했다. 제자들은 대종사의 기거 처소로 영춘원(집무실, 현 구조실) 뒤에 원기 14년 5월 4칸 기와집을 지었다. 대종사는 변산 봉래정사에서 교법을 제정하신 후 원기 9년 (1924년) 9월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에 교화기지를 중앙 총부를 건설했다. 제자들은 대종사의 기거 처소로 영춘원(집무실, 현 구조실) 뒤에 원기 14년 5월 4칸 기와집을 지었다. 대종사는 중앙 총부 최초 건물인 [본원실]에 거주하다가 원기 12년경 금강원으로 옮기고 한때 조실이라 부르며 옥호를 [금강원]이라 했다. (원기 12년경) 현재의 종법실(구조실)이 당시에 영춘원이라 불리웠는데 금강원을 짓고 나서 대종사께서 기거하시는 조실이 되자 "원"이라는 격을 "헌"으로 바꾸어 [영춘헌]으로 이름이 바꾸어지기도 하였다. 월말통신 12호(원기 14년 2월 발행)에 [금강원설법전]이라 한 것을 미루어 보아 이곳에서 대종사께서 설법을 하였으며, 대부분의 집회나 선등 대중 모임 장소를 사용되기도 했다. 다음은 당시 이곳 금강원에 계시며 하신 법문말씀이다. {소태산 대종사 금강원에 계실 때 금강원 뒤편 길가는 탱자나무 울타리로 되어 있었다. 이 길은 익산과 황등을 연결하는 큰 도로로 익산장과 황등장을 보러 다니는 장꾼들이 많았다. 하루는 소태산 대종사께서 장꾼들이 이 길로 다니면서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익산이나 황등으로 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모두다 장사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돈을 좀 많이 벌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이야기들이더라. 그런데 그 사람들 이야기하는 것을 자세히 들어보니 그 장사하고 돈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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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실대종사가 봉래정사에서 중앙총부로 옮긴 후 처음으로 정해진 일정한 곳이다. 원기 12년(1927년) 4월 7일 제 5회 평의원회에서 건립하기로 결정한 후 제 1회 원기 13년(1928년) 6월에 준공된 건물이다. 원기 17년에 수리하여 앞이 한옥이였던 것을 창문으로 바꾸었다. 19년 후원에 화장실과 목욕실을 신설하였다. 방이 4개로 칸막이를 임의로 뜯어서 예회를 보거나 기념례를 지내는 등 다목적용으로 평시에는 칸을 막아 낮에는 사무실로 밤에는 숙소로 사용하였다. 이 집을 제 1회 기념 총회가 열리는 꽃피는 봄날에 지어졌다고 해서 옥호를 [영춘원]이라 하였다. 원기 12년(1927년)6월 22일 준공된 조실은 [금강원]이라 이름하게 되자 영춘원을 동격으로 원(院)이라 할 수 없어 격을 낮추어 헌(軒)이라 하여 [영춘헌]이라 일컬어진 집이다. 그 후 대종사 열반 몇 해 전(원기 20년경)부터 원기 28년(1943년) 6월 1일 열반 직전까지 이 집에서 계속 기거함에 따라 [조실]이라는 이름이 계속되었으며 대종사 뒤를 이은 후대 종법사인 정산종사가 이 건물에서 기거하셨다. 이 구조실은 6칸 겹집으로 구조가 본원실과 거의 동일하며 현재에는 [종법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종법실이 반백년기념사업으로 새로이 건축됨으로 인해서 [교정원장실]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대종사 영정을 모셔놓고 일반적인 사용은 않고 있다. 원기 83년엔 대산상사께서 이곳에서 열반상을 나투셔서 더욱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원기 17년(1932년)개축하고 원기 60년 (1975년) 12월에 보수하였다. 건물 앞에는 당시 대종사가 손수 심은 나무들과 말씀을 받들어 만들어진 정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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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원원기 20년 3월경 신영기의 개인 주택으로 건축되었으나 이듬해 이리 방면으로 이사하면서 총부에 희사하였다. 이곳을 개수하여 원기 21년 5월에 교정원 사무실을 이곳으로 옮겼다. 교정원 사무실을 원기 49년 8월 다시 신축하여 (식당) 옮기고 남자 숙소로 사용하다가 반백년 기념사업 때 사업회 사무실로 사용했다. 현재는 남자 교무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구정원]이라는 이름은 제일 처음 교정원 사무실로 사용했다 하여 [옛날 교정원]이라 했고 그 약칭으로 부른 것이다. 구조는 4간 겹집으로 현관이 있으며 별채로 2간이 있었는데 도서관과 창고로 사용하였었다. 현존하는 당시 총부의 사가는 청하원, 정신원, 구정원이며 헐리고 없는 사가는 전음광, 서중안, 이청춘 등의 사가이다. 청하원은 구타원 이공주의 사가였으며. 정신원은 팔타원 황정신행의 사가였다. 총부에 처음 들어온 사가는 전음광 일가의 사가였다. 2년 뒤 서중안 일가가 이사를 하였고, 이어 이청춘이 이사를 하였다. 이들 사가는 꼭두 마리집 아래로부터 시작하여 차례대로 이청춘, 전음광, 서중안의 순으로 있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당시의 사가 뿐만이 아닌 원불교의 역사적 건물은 대부분 총부 교무의 숙소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총부성지를 순례하는 순례객은 다만 건물의 외형과 그 건물이 지니는 의미를 건물 주위에 소개되는 안내판에만 의지하고 있다. 성지의 신앙적 성역화와 역사적 의미의 부각을 위해서는 충분히 제고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진다. 예를 들어 구정원의 경우 당시 사무실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원불교 역사의 일단을 순례객들에게 보여주며 특히, 청하원과 정신원 및 구정원, 정화정사, 구조실, 금강원, 공회당, 본원실 등의 구역은 원불교 역사의 장으로 조성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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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당원기 14년 2월 1일 임시위원회에서 양잠실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그로 인해 당시 농무원측과 서무부가 합자하여 중앙총부 건설 이후 조실 다음으로 신축된 건물이며 대종사가 직접 감역하셨다. 양잠실로 겸하여 사용하려 하였으나 선(禪)을 하는 장소로만 사용하였다. 양잠실로 활용하지 못한 이유는 봄부터 양잠실로 쓸 경우 봄누에 말기와 하선이 시작될 무렵, 그리고 가을누에의 초기와 하선이 끝나는 시기가 겹쳐졌기 때문이다. 이후 공회당 맞은 편에 목조 초가집을 새로 짓고 신 양잠실로 입주할 수 밖에 없었다.당시 명칭은 [공회당]이라 하였고 종전에 본원실, 금강원, 구조실등에서 행하여진 선이나 예회도 이곳으로 옮겨져 행해졌으며 염불, 회화, 강연, 시국담화 등 원기 20년 대각전이 건축되기 이전까지 모든 행사를 이 곳에서 행하게 되었다. 또 하나는 이 집은 원기 31년 개원된 유일학림(唯一學林·원광대학교 전신) 의 강의가 이루어진 건물로 오늘의 원광대학교가 정식 인가되어 총부 옆에 터를 잡고 옮기자 남자 숙소로 사용되었다. 원기 39년 중앙선원이 개원될 때 이곳에서 시작하였고, 원기 48년 중앙선원이 발전하고 해체된 후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남기숙사로 사용되었다. 원기 57년 반백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건물 서쪽 일부가 헐리워졌다. 집의 구조는 중앙에 남쪽으로 현관이 있고 다락 밑에는 지하실이 있는데 이곳은 양잠을 할 때 비가 오면 이곳에 뽕잎을 저장하였다. 목조 7간 겹집으로 지붕은 함석이다. 원기 63년부터 총부 선도량화를 추진하기 위해서 상주선원을 개설함으로 인해 [중앙선원]이라 불리던 공회당은 [상주선원]으로 개칭되었다. 상주선원은 중앙훈련원과 별도로 재가 교도들에게 교리훈련을 시키는 훈련기관이었다. 상주선원 사무실(서쪽방)과 강의실 (동쪽방)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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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원중앙 총부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언덕에 있는 첫 건물이다. 원기 17년(1932년) 7월 구타원 이공주 법사가 총부에 와 본원실의 동아실을 사용하다가 본인의 사가로 지은 집이다. 그후 원기 21년 (1936년) 9월에는 불법연구회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하여 이리 경찰서 북일 주재소를 설치했던 건물이다. 대종사 당대 제일 좋은 집이기에 응접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원기 48년 4월 11회 정기 수위단회에서 수도원의 발족이 인가된 후 청하원은 수도원이 되었으나 개교 반백년기념사업 때 정문 확장공사로 인해 담장과 문간채가 헐리게 되었다. 현재 중앙총부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건물이며 수위단사무처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감찰원 감찰원장실로 사용되고 있다. 청하원이라는 이름은 이공주 선진의 아호가 청하인데서 유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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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원원기 26년(1941) 팔타원 황정신행 대호법이 총부 구내에 지은 사가이다. 그 후 총부에 희사하고 익산교당 창립 당시 이곳을 교당으로 사용하였으며 감찰원 사무실과 교서 편찬을 맡았던 정화사(正和社)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현재 정산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 사업회 사무실로 쓰여지고 있다. 팔타원 황정신행 대호법은 1903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그당시에 이화여전을 나오는 등 신세대 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이었다. 원기 20년 대종사를 만나 제자로 귀의하였으며 초기 교단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해방후 한국보육원을 설립하여 당대 한국 제 1의 고아사업을 펼쳤으며 현재도 보육원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고아의 어머니로 불리우는 팔타원 대호법은 원불교 최초의 대호법 수훈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