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성지-사적지보기
박실구도지
관련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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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
지정년도 |
상세설명 DESCRIPTION
정산종사 13세 되시던 해 봄에 여청운과 결혼을 하게 되자 부친 송벽조는 새로 집을 지어 박실로 이사하게 되었다. 소야 성장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초전면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정산종사는 비록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은 했지만 가정생활은 거의 관심이 없었고 다만 구도에 대한 열정만 더해갔다.
박실마을 집 뒷뜰에 거북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정산종사는 "후일에 천하 창생을 제도하는 사업을 이뤄서 그 빛난 이름이 영원한 세상에 유전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정산종사는 밤에는 거북바위에서 이렇게 기도를 올리고 낮에는 [사략]이라는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의사와 포부를 나타내는 [장부회국론]이라는 긴 글을 짓기도 하였다. 그 뜻은 "대장부가 이 세상에 출세하여 마땅히 공중사에 헌신봉공하여 그 은혜가 천하만민에게 골고루 미쳐가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갓 구구한 가정생활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이다"는 것이었다. 현재 이 글은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정산종사는 거북바위 기도를 상당히 계속하였으나 별 효과가 없자 집안에서 올리면 효과가 있을까 생각하여 방안에 [천문도]와 [지도서]를 그려놓고 천문도를 향해 하늘 기운이 응하기를 빌고 지도서를 향해 땅 기운이 응하기를 빌었다.
이러한 기도에도 별 감응을 얻지 못하던 중 정산종사는 처가에서 가야산의 여처사 이야기를 듣고 가야산으로 구도를 떠나기도 하였다. 두 번의 가야산행에서 여처사를 만나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세 번째의 가야산행에 도꾼들을 만나 전라도로 스승을 찾아 떠날 것을 결심하게 되고 정산종사는 전라도로 떠나게 된다.
지금 이곳엔 거북바위가 아직도 정산종사의 구도일념을 대변해 앉아있고 중앙문화원에서 박실 구도지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중앙문화원에서 원기 70년(1985) 12월 3일 기념비를 세웠는데, 비 형식은 화강석의 거북 좌대 위에 비를 세우고 용 여덟마리가 양각된 갓석을 씌운 한국 고유의 비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기념비 높이는 기단 1자, 거북좌대 3자, 용관 3.5자로 총 높이는 약 4.5m이다. 최근에는 대각전과 원불당 등이 건립되어 성주성지로서의 면목을 일신하고 있다.
[구도지비문]
여기는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 박실마을. 정산종사 성장 구도지 옛 집터다. 종사의 선대 고개 넘어 고산동에 세거(世居)하시다가 조부 훈동공(薰動公) 구성동에 오시어 정산 주산 형제분 거기 나시고 얼마 후 소야 거쳐 박실로 오시니 이에 여기가 뜻 깊고 거룩한 터전 되었다. 후원 거북바위 사무친 소원 빌던 기도터요 멀리 가야산 숨가쁘게 구도하시던 역정(歷程)의 산하다. 산에서 만난 천제인(天祭人) 연원으로 여기 치성하실제 천악(天樂)이 동지(動地)하였고 스승찾아 전라도에 유력(遊歷)하시다가 화해에서 대종사와 제우(際遇)하시어 영겁대사를 이루시었다. 바로 봉명(奉命)하여 영광으로 이사(移徙)하시니 돌보지 않은 오랜 세월에 집은 헐려 유허(遺墟)로 화(化)하였으나 거룩할사 이 터전 새 회상 아성(亞聖)께서 봉황(鳳凰)으로 자라시고 잠룡(潛龍)으로 머무시던 곳 소소구성(蕭韶九成)에 봉황이 래의(來儀)로다.
박실마을 집 뒷뜰에 거북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정산종사는 "후일에 천하 창생을 제도하는 사업을 이뤄서 그 빛난 이름이 영원한 세상에 유전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정산종사는 밤에는 거북바위에서 이렇게 기도를 올리고 낮에는 [사략]이라는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의사와 포부를 나타내는 [장부회국론]이라는 긴 글을 짓기도 하였다. 그 뜻은 "대장부가 이 세상에 출세하여 마땅히 공중사에 헌신봉공하여 그 은혜가 천하만민에게 골고루 미쳐가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갓 구구한 가정생활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이다"는 것이었다. 현재 이 글은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정산종사는 거북바위 기도를 상당히 계속하였으나 별 효과가 없자 집안에서 올리면 효과가 있을까 생각하여 방안에 [천문도]와 [지도서]를 그려놓고 천문도를 향해 하늘 기운이 응하기를 빌고 지도서를 향해 땅 기운이 응하기를 빌었다.
이러한 기도에도 별 감응을 얻지 못하던 중 정산종사는 처가에서 가야산의 여처사 이야기를 듣고 가야산으로 구도를 떠나기도 하였다. 두 번의 가야산행에서 여처사를 만나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세 번째의 가야산행에 도꾼들을 만나 전라도로 스승을 찾아 떠날 것을 결심하게 되고 정산종사는 전라도로 떠나게 된다.
지금 이곳엔 거북바위가 아직도 정산종사의 구도일념을 대변해 앉아있고 중앙문화원에서 박실 구도지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중앙문화원에서 원기 70년(1985) 12월 3일 기념비를 세웠는데, 비 형식은 화강석의 거북 좌대 위에 비를 세우고 용 여덟마리가 양각된 갓석을 씌운 한국 고유의 비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기념비 높이는 기단 1자, 거북좌대 3자, 용관 3.5자로 총 높이는 약 4.5m이다. 최근에는 대각전과 원불당 등이 건립되어 성주성지로서의 면목을 일신하고 있다.
[구도지비문]
여기는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 박실마을. 정산종사 성장 구도지 옛 집터다. 종사의 선대 고개 넘어 고산동에 세거(世居)하시다가 조부 훈동공(薰動公) 구성동에 오시어 정산 주산 형제분 거기 나시고 얼마 후 소야 거쳐 박실로 오시니 이에 여기가 뜻 깊고 거룩한 터전 되었다. 후원 거북바위 사무친 소원 빌던 기도터요 멀리 가야산 숨가쁘게 구도하시던 역정(歷程)의 산하다. 산에서 만난 천제인(天祭人) 연원으로 여기 치성하실제 천악(天樂)이 동지(動地)하였고 스승찾아 전라도에 유력(遊歷)하시다가 화해에서 대종사와 제우(際遇)하시어 영겁대사를 이루시었다. 바로 봉명(奉命)하여 영광으로 이사(移徙)하시니 돌보지 않은 오랜 세월에 집은 헐려 유허(遺墟)로 화(化)하였으나 거룩할사 이 터전 새 회상 아성(亞聖)께서 봉황(鳳凰)으로 자라시고 잠룡(潛龍)으로 머무시던 곳 소소구성(蕭韶九成)에 봉황이 래의(來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