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교조인 소태산은 영광군 법성포에서 와탄천을 따라 4㎞정도 거슬러 올라간 산골마을인 백수면 길룡리의 영촌 마을에서 1891년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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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무렵부터는 산신을 만나기 위하여 1년여 동안 산에 올라가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고대소설에 나오는 도사 이야기를 듣고 도사를 만나기 위하여 백방으로 찾아다니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태에 있던 그는 26세 되던 1916년 4월 28일의 이른 새벽에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은 그는 그동안의 의문을 생각해보니 모두가 ‘한 생각을 넘지 않았다’고 하며 그 깨달음의 경지를 ‘萬有가 한 體性이며 萬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의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표현하였다. 소태산은 깨달음을 얻은 후 바로 사십 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드니 그 가운데 9인을 골라 교단 창립의 중심인물로 삼고 저축조합을 시작으로 원불교의 종교 활동을 전개해 오다가 1943년 6월1일 익산에서 53세를 일기로 열반하였다. 소태산은 20세에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고 장남은 원광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박길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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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의 인품에 관해서는 소태산의 열반 후 종법사를 이어 받은 정산 송규(1900~1962)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
WON BUDDHISM
교조 박중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