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조 박중빈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은 영광군 법성포에서 와탄천을 따라 4㎞정도 거슬러 올라간 산골마을인 백수면 길룡리의 영촌 마을에서 1891년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7~9세) 사물에 남다른 호기심을 가져 하늘, 구름, 바람 등에 관한 질문으로 부모와 주위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어른들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항시 의문을 가지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를 해결 하고자 하는 의지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학력은 7살 무렵 한문서당에 6개월간 다닌 것 이 전부이며 마음속에 간직한 우주와 인간에 관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12살 무렵부터는 산신을 만나기 위하여 1년여 동안 산에 올라가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고대소설에 나오는 도사 이야기를 듣고 도사를 만나기 위하여 백방으로 찾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산신과 도사를 만날 수 없게 되자 23세 무렵부터는 실의에 빠져 방안에 들어앉아 의식을 잊어버린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소태산은 가슴에는 적이 생기고 온몸에는 종기가 나고 수염과 머리가 길어서 이웃 사람들은 그를 폐인으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에 있던 그는 26세 되던 1916년 4월 28일의 이른 새벽에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은 그는 그동안의 의문을 생각해보니 모두가 ‘한 생각을 넘지 않았다’고 하며 그 깨달음의 경지를 ‘萬有가 한 體性이며 萬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의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표현하였다.
소태산은 깨달음을 얻은 후 바로 사십 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드니 그 가운데 9인을 골라 교단 창립의 중심인물로 삼고 저축조합을 시작으로 원불교의 종교 활동을 전개해 오다가 1943년 6월1일 익산에서 53세를 일기로 열반하였다. 소태산은 20세에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고 장남은 원광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박길진이다.
대종사의 인품에 관해서는 소태산의 열반 후 종법사를 이어 받은 정산 송규(1900~1962)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오호라, 대종사는 일찍이 曠劫種聖(광겁종성)으로 궁촌변지에 생장하시어 학문의 수습이 없었으나 대도를 자각하시었으며 板蕩(판탕)한 시국을 당하였으나 사업을 주저하지 아니하시고 완강한 중생을 대할지라도 제도의 만능을 구비하시었으며, 기상은 泰山喬嶽(태산교악)같으시나 春風和氣(춘풍화기)의 자비가 겸전하시고 처사는 磊磊落落(뇌뇌낙낙)하시거나 세세곡절의 진정을 통해 주시며 옛 법을 개조하시나 대의는 더욱 세우시고 시대의 병을 바루시나 완고에는 그치지 않게 하시며 만법을 하나에 총섭하시나 분별은 더욱 역역히 밝히시고 하나를 만법에 사용하시나 본체는 항상 여여히 들어내사 안으로 無上妙意(무상묘의)의 원리에 근거하시고 밖으로 사사물물의 지류까지 통하시어 일원대도의 바른 법을 시방삼세에 한없이 열으시었으니 이른바 百億化身(백억화신)의 如來(여래)시요 集群聖以大成(집군성이대성)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