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과 발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1916년 전라남도 영광군의 한 시골마을에서 26세의 청년 소태산이 인류구원의 목표 아래 새로운 종교인 원불교를 창시하면서 내걸었던 표어이다.
소태산은 인류의 현실을 인간이 물질주의에 매몰 되어 가는 상황으로 규정하고 인간정신의 자주성을 확립함으로써 바람직한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새로운 종교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소태산은 그를 따르는 40여명의 사람들을 모아 저축조합을 결성하고 소비절약과 금주·단연, 공동노동을 통하여 자금을 모으고 이를 토대로 숯장사를 하는 등, 조합의 공동자금을 마련하였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조합원들과 함께 1년여의 기간에 걸쳐 마을 앞의 간석지에 제방을 쌓아 3만여 평의 농토를 개간하였다(1919.3.).
간척사업의 과정은 주경야독을 통하여 소태산의 포부와 경륜을 제자들에게 교육하는 과정이었으며 원불교 교단의 조직화 과정이었다. 간척사업이 완공될 무렵, 전국은 3·1운동의 독립만세 시위로 들끓었고 만세시위는 영광읍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소태산은 이 와중에 아홉제자들에게 길룡리 주변의 산봉우리에 각각의 방위를 정해주고 인류의 정신개벽과 구원을 위한 기도를 하도록 명하여 血印의 이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태산의 이 같은 출발은 3년 만에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영광경찰서에 소환되어 1주일 동안이나 저축조합과 간척공사의 자금출처 등에 관한 조사를 받은 후 돌연 전북 부안 내변산의 실상사 인근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곳에서 간간이 영광의 제자들과 연락을 하면서 자신의 포부와 경륜을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모색을 하게 되었다.
내변산에서 약 5년간의 생활은 승려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불교의 현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 ‘조선불교혁신론’을 저술하기도 하였으며 이 시기에 원불교 교리와 제도의 초안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각지로부터 찾아오는 사람들을 귀의시키면서 새로운 교단 조직의 필요성과 그 장소를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1924년 봄, 소태산은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용리(현 익산시 신용동)에 3천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불법연구회는 조선총독부의 소위 문화정치라는 슬로건 아래 정치단체를 제외한 사회단체 의 활동을 허용한 유화국면을 이용하여 종교단체로 등록함으로써 종교활동을 합법적으로 보장받고자 한 것이었다.
익산에서의 활동은 역시 공동생활을 통한 소작 경영과 황무지 개간 등으로 생산에 힘쓰고 상조조합을 창설하여 근검절약에 의한 자금 저축에 노력 하였다. 당시의 생활은 영육쌍전의 이념아래 주경야독을 실천하였다. 또한 종래 영광의 조직을 불법연구회 영광지회로 신흥지회 등으로 복원하고 각지의 인연을 따라 지회를 설립해 나아갔다.
아울러 각지 회원의 증가에 따라 <월말통신>, <회 보> 등을 간행하였다. 이 시기 소태산은 ‘종교와 정치’, ‘강자로 약자 되는 법문’, ‘금강산과 그 주인’, ‘조선은 어변성룡이 되어가고 있다.’등의 법설을 통하여 조선의 식민지적 처지와 일본의 강압적인 통치를 비유하여 설명하고 장차 조선은 금강산으로 인하여 세계의 일등 문명국으로 성장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태산의 활동은 1920년대에는 당시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기도 하였으나 일본 경찰로부터의 감시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불법연구회는 당시 교당 7개소에 약 5,800명의 교도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1936년 익산경찰서는 불법연구회 구내에 북일면 순사주재소를 설치하였다.
소태산과 불법연구회는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불법연구회의 모든 활동은 상주하는 경찰관 3인에 의하여 감시를 받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총독부 관리들이 불시에 방문하여 회계서류를 감사하는 등의 수모를 겪어야 했으나 이들에게 빌미를 줄만한 일은 없었다. 이 시기 <회보>에 게재되는 모든 글들은 인쇄 되기 전에 검열을 받아야 했고 심지어는 문장표현 하나하나를 문제 삼아 삭제나 정간이 되기도 하고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글을 강제로 실어야 했으며 결국 1940년에는 강제 폐간의 수난을 겪었다. 또한 1943년 소태산의 열반 이후에는 불법연구회의 황도불교화를 강제하였으나 이를 미루어 오던 중 일본의 패전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1945년 해방 당시 교단현황은 교당 25개소에 교도 8천여명 정도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불법연구회는 약 1년 동안 서울역과 부산역 그리고 전주와 이리역에서 전재 동포구호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건국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념과 제도적으로 중도주의를 지향하는 ‘건국론’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이념 대립의 심화와 분단국가 수립과정에서 그 입지를 잃고 말았다.
해방 후 교명을 원불교로 바꾼 교단은 분단체제 하에서 교단 내부적인 역량 강화에 주안점을 두고 교단의 3대 목표인 교화, 교육, 복지사업에 역량을 집결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해방 후 원 불교 활동의 특징은 교역자 양성을 위한 대학교육 기관의 설립, 원불교 교리에 바탕 한 국내외 종교 간의 대화와 교류사업의 추진, 다양한 복지사업 시설의 운영 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