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사상적 배경
19세기 후반의 한국사는 변혁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중국을 비롯하여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한반도에 대한 정치 경제적 침략을 막고 나라의 주권을 수호해야 했고 국내적으로는 한계에 이른 조선왕조의 봉건적 지배체제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나라의 주권수호와 근대개혁을 위한 다양한 변혁운동이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주권수호와 근대변혁운동은 실패하고 1910년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시기 조선왕조 5백년의 지도이념이었던 성리학은 그 사상적 한계에 이르러 새로운 시대에 조응하는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하는 시기였다.
성리학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이미 18세기 실학 사상과 북학사상으로 제기되었지만 19세기 체제의 보수 반동적 성격때문에 서학을 빌미로 하는 진보세력에 대한 정치탄압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척사위정사상, 개화사상, 동학사상이 대두되어 이 시기 변혁운동을 이끌어 가는 지도이념으로 자리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와 불교사상은 변혁운동의 지도이념으로는 발전하지 못하였으나 교육·의료사업을 통하여 왕실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데 치중하였다.
한편, 19세기 봉건체제의 모순 심화는 지배세력의 수탈의 강화로 농민들은 담세능력의 한계에 이르러 민중생활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조선후기 이래로 민중의 현세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이상세계는 주로 미륵신앙이나 정감록 신앙으로 나타났다.
또한 <홍길동전>의 율도국이나 <허생전>의 변산 무인도 같은 맥락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생활의 고난과 민중적 이상향에 대한 희원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외세의 침략과 체제모순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동학사상(=地上仙境)이 그 해답을 제시한 것이었다.
동학은 최수운의 처형 이후 농민층에 확산되어 1894년 반봉건 반외세의 전국적인 농민전쟁의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외세에 의한 농민전쟁의 진압으로 동학은 국가로부터 반역자의 무리로 낙인되고 말았다. 농민전쟁의 좌절 이후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는 많은 신종교들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민족문제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식민지화 이후에는 종교의 보편적인 목적을 강조함으로써 민족문제를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이게되는데, 이는
불교와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政敎分離의 원칙이 바로 총독부권력과의 타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는 1910년대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중빈(소태산, 1891~1943)이라는 청년에 의하여 창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