边山城池-查看历史遗迹
-
원광선원(圓光禪院)지금부터 30여년전에 월명암 주지 정도전 스님은 월명암 산길이 험하고 불편한지라 인근 부락에 암자를 짓고 선방을 하길 원했다. 도전 스님이 문수보살께 천일기도를 올리고 암자를 지으니 그것이 곧 문수암이었다. 그런데 도전 스님이 스승인 지선스님께 암자를 하나 지었으니 한 번 와 주십사 했더니 문수암에 와서 보고 절 이름은 지형이나 여러 가지를 보고 짓는 것이라며 원래 선방에도 뜻이 있었고 지형을 보니 [원광선원(圓光禪院)] 이라 하면 좋겠다며 현판을 원광선원으로 써 주었다 하는데 지금 원광선원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원광선원에서 지역주민들 교화에 힘쓰던 도전스님이 사적인 일로 이 곳 원광선원을 원불교에 매각하여, 원기 63년에 정읍교당이 중심이 되어 부속 임야와 함께 사찰을 인수해 현재 [원광선원]이 되었다. 원기 77년에는 수양원에서 변산 원광훈련원으로 개정, 교도들의 훈련에 일임하고 있다. 이 원광선원의 인수는 교단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제법성지가 소실된 후 특별한 관리를 해오지 못했던 변산성지의 장엄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광선원 법당 뒤쪽에는 새로운 탑이 하나 조성되었는데 정산종사 추모탑이다. 이 탑은 원래 총부 영모전 옆에 있던 정산종사 성탑으로 원기 73년 11월 대종사 탄생 1백주년 성업봉찬 사업회가 총부 대종사 성탑 옆에 새 탑을 세우면서 해체한 것을 원기 81년 이곳으로 옮겨와 재건한 것이다. 또한 법당도 원기 81년 다시 새 단장을 하였다.
-
일원대도비변산 성지사업회의 제법성지 장엄공사 1차 사업으로 교강(敎綱)반포 60주년을 기념하여 원기 65년(1980) 7월 17일 교강 반포의 땅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석두암터)에 세운 기념비다.석두암터의 좌측 자연석 위에 30cm 높이의 비각을 세우고 이 위에 30cm 두께의 기단 세 개를 얹은 후 180cm의 오석(烏石)을 책 모양으로 조각한 비신을 세웠다. 기념비의 높이는 지상에서 약 3.6m로 전면에는 제법성지를 기념하는 대산종사 휘호[일원대도(一圓大道)]를 음각으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제법성지 비문을 적었다. 새 會相의 圓音 여기는 圓佛敎 制法聖地 蓬來精舍 石頭菴터! 圓紀 4年 己未 10月 少太山大宗師 邊山에 드시어 月明에서 法認祈禱回向하시고 이 아래 草堂에서 새 敎綱펴신 후 여기 精舍짓고 갑자 4月까지 鼎山宗師등 2-3弟子 데리시고 새 敎法制定과 宿緣들 際遇로 새會上公開를 준비하시니 거룩할사 이 터전! 새 會上 圓音의 産室이어라 圓紀六十五年 四月 邊山制法聖地事業會
-
월명암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쌍선봉 아래에 있는 사찰로 선운사의 말사이다. 691년 불교 3대 거사중 한 명인 [부설거사(浮雪居士)]에 의해 신라 신문왕때 창건된 암자이다. 그의 딸 월명(月明)이 수도하던 것이라 하여 [월명암]이라 부르게 되었다하며, 이후 조선 선조에 이르러 여래 대기로 일컬어지는 진묵스님이 주석한 선도량 사찰로 17년 동안 머물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1863년(철종 14년) 性庵(성암)이 중건하였다. 1908년에 불탄 것을 1915년 백학명선사가 중건하였고 6.25때 소실되었으나 1956년에는 圓鏡(원경)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종사는 봉래정사에 머물 때 당시 주지인 백학명선사와 만나 교우를 가졌다. 원기 4년(1919) 7월에 혈인기도가 끝나자 정산종사를 월명암에 보내어 백학명 선사의 상좌로 있게 한 암자이다. 정산종사는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스승을 가까이 모시고 싶은 마음에 3km 떨어진 석두암까지 내려가 대종사의 법문을 듣고 새벽에 다시 올라오곤 했던 信誠(신성)이 뭉친 곳이다. 후인들은 봉래정사와 월명암 사이로 난 길을 鼎山路(정산로)라고 부르고 있다. 한편, 월명암이 위치한 쌍선봉은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혈인기도 회향처로 알려져있다.
-
봉래구곡중계계곡의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직소폭포의 높이는 약 30m가 되고, 예리한 칼날로 잘라낸 듯 육중한 암벽단애를 흰 푯말을 일으키며 뇌성같은 소리를 내면서 쉴새없이 쏟아지는 물은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고 둥근 소(沼)를 만들면서 떨어지는데 직소폭포는 폭포가 갖추어야할 산세, 절벽, 계곡, 소 등의 필수적인 제반 조건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폭포로 꼽히고 있으며 둥근 소의 이름은 실상용추(實相龍湫)라 한다. 폭포를 받치고 있는 실상용추는 직경이 50m 정도이며, 깊이 헤아리기 어려운 심연(深淵)을 이루고 있다. 직소폭포를 흐른 물이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꺾이고 감돌아 펑퍼짐한 반석위로 흐르는 잔조로운 물줄기를 이루었고, 은반에 옥이 구르듯 몇 굽이 감돌아 반석 아래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머무는 듯 넘나드는 이 곳이 바로 봉래구곡(蓬來九曲)이다. 봉래구곡은 제 1곡 대소(大沼)에서 제 9곡 암지(暗池)까지 서로 다른 이름과 경치가 있는 아홉 개의 명승(1曲 : 대소(大沼), 2曲 : 직소폭포, 3曲 : 분옥담(墳玉潭), 4曲 : 선녀탕(仙女湯), 5曲 : 봉래곡(蓬來曲), 6曲 : 금강소(金剛沼), 7曲 : 영지(影池), 8曲 : 백천(百川), 9曲 : 암지(暗池))을 말한 것이며 현재의 봉래구곡이라 불리우는 곳은 원래의 제 5곡인 봉래곡(蓬來曲)이었는데 9곡(曲)중 가장 중심지인 관계로 어느 때부터인지 9곡을 대변하는 이름으로 봉래구곡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펑퍼짐한 반석 위에 명필로 쓴 [蓬來九曲]의 각자(刻字)가 드러나 있다. 대종사가 봉래정사에서 제자들에게 이 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 하며 다음과 같은 선시를 읊었다.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
-
하섬하섬은 부안 변산 반도의 서북내해에 위치한 해상수양원인 동시에 하계 훈련도량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북 부안 변산 반도의 서단 노령산맥이 끝나는 곳으로 행정구역은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 1∼2번지이며, 세우같이 생겼다 해서 하섬(蝦島)이라 이름 불리웠다. 그러다가 대종사와 정산종사께서 해제기도 마치시고 하섬을 바라보시며 연꽃처럼 생겼다고 하신 이후, 연꽃을 의미하는 하섬(荷島)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섬의 총면적은 약 3만 5천여평, 그 중 경작지인 밭이 4천 6백여 평이다. 하섬은 육지에서 1km쯤 떨어져 있으며 변산 해수욕장과 직선거리로 8km 떨어진 섬으로 섬 주위를 도는 데 약 30분 가량 소요된다. 이러한 하섬은 조선 말엽까지만 해도 주인이 없는 섬으로 고기잡이 나가는 어부들이 잠깐 쉬며 물을 긷는 섬이었다. 그러나 일제때 부안에 사는 신임근씨 소유가 되었다가 부안교당 정양진교무가 원기 39년(1954) 매입하여 본교에 귀속되었으나 하섬을 개간한 사람들과의 경작권 관계로 이후 15년만에 원볼교에 귀속되었다. 원기 46년에는 대산 종사가 이곳 하섬에서 정양중에 {교전대의 (敎典大義)}를 초안 하셨고, 47년부터는 이공전 종사를 주재한 정화사에서 예전, 성가, 정산종사법어, 고교총간 등을 편수하기도 하였다. 하섬에는 하섬팔경이 있는데 제 1경은 [첫등해로(海路)]로서 음력 1일과 15일부터 각 3일 정도의 간조 때면 하섬입구인 [첫등]에 바다가 갈라지면서 바닷길이 생겨 도보로 왕래할 수 있는 자각길이 나오는데 전남 완도의 바닷길과 버금가는 바다의 조화를 말한다. 제 2경인 [서해낙조(西海落照)]는 잔잔한 수평선 너머에 붉게 붉게 숨어드는 낙조의 장관을 이름이요, 제 3경은 [쌍선명월(雙仙明月)]로 섬에서 보는 쌍선봉에 걸리는 밝은 달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으며, 제 4경은...
-
청련암청련암은 부안군 변산면 석포리 내소사에 속해있는 암자로서 내소사에서 가늠봉(세봉)으로 가는 험한 길 8부능선에 약 1100여년 전에 창건된 암자다. 대종경 수행품 34장에 청련암 뒷산 험한 재를 넘다가 "험한 길을 당하니 일심공부가 저절로 되는도다. 평탄한 곳에서 실수가 있기 쉬우니 공부하는 사람이 험하고 평탄한 곳이나 어렵고 쉬운 일에 대중이 한결 같아야 일행삼매(一行三昧)의 공부를 성취하리라"는 법문을 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곰소항과 내소사 경내를 발 아래로 하는 경관과 부근 낙석대와 청련암 뒷산 등성을 타고 봉래정사로 내려가는 길은 가을 잡목단풍이 일품이며 겨울 설경도 아름답다. 또한 한 여름 더위에 지친 몸을 쉬며 눈을 들면 짙은 녹음사이로 한 줄기 내려꽂히는 직소폭포는 가히 절경이다.
-
이춘풍가경상도 금릉 사람인 이춘풍은 고향을 떠나 타향에 사는 고모댁을 환고향(還故鄕) 시킨다고 전라도에 왔다가 대종사를 만나 마음이 황홀하여 '마치 공자님을 뵈온 것 같은 감상을 갖게 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고모 댁과 같이 대종사의 문하에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올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영광으로 이사를 오는 도중에 대종사의 명에 의해 영광이 아닌 변산 부안군 보안면 신복리 중곡부락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곰소와 줄포사이 한길가의 집으로, 이 때가 원기 8년(1923) 2월이었다. 이후 중곡부락의 이춘풍 선진가는 대종사의 여러 제자들이 영광 법성포에서 배편으로와 밤을 지내는 유숙처가 되었고, 초당에서 오후 늦게 나와 배편을 알아보고 다음날 일찍 법성포로 나갈 수 있는 중간지점 역할을 했다. 또한 대종사를 찾아오는 많은 신도들이 이 곳에서 길을 물어 바디재를 넘어서 봉래정사로 가는 안내처로도 이용되었다. 그후 대종사가 총부 건설로 익산으로 간 후 이춘풍선진은 변산 실상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원기 7년부터 12년까지 그곳에서 봉래정사의 수호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춘풍 선진은 이때 산중풍경(山中風景)을 저술하여 초기 교단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기었다. 후에 출가하여 정기훈련 여선원 교무로 지도를 하고 서울교화에 종사하다 지병으로 휴무하여 원기 15년 말 자택에서 열반하였다. 현재 이춘풍 선진가는 일반인의 소유로 넘어가져 있고 건물은 새로 지어져있으며 그 자리만 알아볼 수 있다.
-
곰소항전북 부안군 진서면에 있는 어항으로 대종사 영광에서 변산, 봉래정사를 오기 위해서는 배편이 제일 빨랐으며 법성포에서 배를 타고 주로 곰소항에서 내려 도보로 봉래정사에 갔다. 곰소항은 조그마한 어항으로 3∼6월까지의 성어기에는 크고 작은 선박들이 몰려 고기를 잡지만 퇴적현상이 심해질수록 어항으로서의 면모를 잃어 가고 있으며 이 일대의 염전은 어항과 더블어 이 지방의 소득원이기도 하다. 대종사는 부안 봉래정사에 계셨을 때 영산이나 영광지방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곰소 또는 줄포에 내려가 변산 봉래정사로 들어가는 해로의 길목이었던 어항이다. 곰소에서 원기 4년 5월 대종사와 한 제자와 함께 변산에 다녀가다가 어느 여관에서 하룻밤을 유숙하는데 한 밤중에 금사망보를 받은 소복한 여인이 대종사를 찾아와 자신의 죄상을 고하고 천도를 요청하매 그 여인의 천도를 기원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 곳이며 성리품과 실시품에도 지명이 나오고 있다.
-
실상초당터대종사는 사산 오창건과 함께 원기 4년 3월 전북 부안군 봉래산에 있는 월명암에서 10여일 유숙한 후 다시 영산으로 돌아와 7월에 법인성사를 마치고 정산종사를 월명암으로 보내어 당시 선승으로 이름 높은 월명암 주지 백학명선사의 상좌로 있게 하였다. 그 후 저축조합의 후속 사무를 여러 제자에게 부탁하고 원기 4년 12월에 월명암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 때 송적벽, 김남천, 김혜월, 이청풍 등의 제자들이 대종사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시봉하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12월경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산내면 중계리 내변산의 직소폭포로 가는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실상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9년(689) 초의선사가 창건하고 조선조 태종 대 왕녕대군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6,25 동란 때 불에 타버려 현재는 절터만이 남아 있다) 옆편에 수간의 초당을 매입하여 거처를 정하신 후 간고한 살림을 시작하였고 이곳이 바로 [실상초당]이다. 여기에서 심신의 휴양에 전력하는 동시에 원기 5년부터 영광 김제등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조석으로 설법하였으며, 3월에는 회성곡(回性曲)이라는 가사체로 된 상,중,하편을 지었고, 4월에는 본교 교강인 사은 사요와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하였다. 특히 실상사에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실지불공의 법문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같은 해 (원기 5년) 6월에 대종사는 실상초당에서 거처함이 너무 협소하고 신도들이 내왕하는데 불편을 느껴 김남천, 송적벽 등의 발의로 봉래정사를 신축하였다. 이로 인해 대종사는 모든 사업을 놓고 수양시간을 많이 가지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법문을 많이 하였으며, 월명암 백학명선사와도 선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던 곳이다. 대종경 성리품에 보면 봉래정사에 관한...
-
석두암터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실상사 옆 100m거리, 내변산 직소폭포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대종사가 원기 4년(1919)에 들어와 휴양과 제법(制法)을 한 처소로 석두암이 있던 곳이다. 석두암은 송적벽, 김남천이 발기하여 친히 제자들과 지은 3간 초옥으로 동향집이다. 방과 방사이에는 칸막이로 되어 있었고 각 방 옆과 앞에 마루가 불어 있었으며 북쪽에는 부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거북바위가 있고 [석두암(石頭庵)]이라는 간판은 검정바위에 흰색 글씨로 새겨졌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닌 석두암은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 이 집에서 『조선불교 혁신론(朝鮮佛敎 革新論)』과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등을 차례로 초안하였다. 이 터는 또한 익산총부 건설의 인연이 된 서중안 형제를 만나게 되고 교단 초기 많은 역할이 되어졌던 제자들을 만나신 곳이다. 이 곳 석두암에서 사산 오창건을 비롯 문정규, 김남천, 송적벽, 이청풍 등이 시봉하였다. 이 터를 기념하기 위하여 변산 성지사업회에서는 교강반포 60주년을 기념하여 교강반포 기념비 [일원대도 비]를 세웠는데 이때 [봉래정사 석두암터 비]도 함께 세웠다. [일원대도 비]는 뒤에 다시 설명을 하고 [봉래정사 석두암터 비]는 석두암 중앙 산비탈에 박혀 있는 자연석 사이에 30cm의 기석을 놓고 그 위에 120cm의 오석(烏石)에 음각으로 전면에 [봉래정사 석두암 터]를 새기고 뒷면에는 변산 제법성지 사업회 임원명단과 성금 내력 등을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