荣山圣地 – 查看历史遗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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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도실터영산출장소에서 서쪽으로 40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는 원불교 교단 최초의 집으로 원기 3년 간석지 개척공사가 한참 진행되는 가운데 대종사 제자들과 함께 수련과 집회를 하기 위해 마련한 집으로 오늘날 교당의 효시가 되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대종사는 임시 방언 사무소를 돛드레미 제각보다 방언공사 현장에서 가까운 강변주점으로 옮겼으나 방 하나를 빌린 이 곳 역시, 대종사와 그의 제자들의 집회 장소로는 너무나도 좁았고, 또 도를 공부하는 사람들로서 주막에 머무르는 것에 대한 모순적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 근거는 {불법연구회 창건사}를 보면 [10월에 옥녀봉 하에 본 조합실(組合室 건축을 착수하여 12월에 이를 준공하였다. 자(自 병진 이후로 조합원의 집회 장소가 일정하지 못하여 처음은 범현동에 있는 이끼 제각 일우(一隅를 차용하였고 다음은 강변 주점을 임시 방언 관리소로 정하였으나 모두 협착하고 또한 여러 가지 행사에 자유롭지 못하여 대단 불편을 느끼고 있던 중 이에 비로소 건축을 기공한 것인 바 조합원 등이 일변은 방언에 종사하고 일변은 가역에 종사하여 산에 올라 나무를 베고 땅을 녹여 흙을 이겨서 풍설을 무릅쓰고 근근히 성조(成造를 필역하니, 이것이 곧 본회의 가장 처음 건설된 회실(會室이었다.] 그러한 집회 장소의 필요성에 의해 1918년(원기 3년 10월에 착공하여 12월에 준공되었으며 초가집에 가로 세칸, 세로 세칸으로 아홉칸의 방이 있었다. 이는 아홉단원의 모임방이라서 [외집실] 또는 [교실] 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도(道 공부를 하고 기도하는 집이라 하여 [도실]이라고도 하였는데, 방 아홉칸이 들여졌다해서 [구간도실]이라고도 했다. 대종사는 그 상량에 [사원기일월 직춘추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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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전원기 20년 총부에 대각전을 건립하고 이듬해인 원기 21년 12월에 건축되었다. 처음엔 함석집으로 이 집으로 인해 영광에서 원불교에 대한 인정을 받게 되였을 정도로 그 규모가 당시 영광지역에서는 가장 켰다. 처음에는 1/3을 막아 다다미방으로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온돌방으로 선원 남학생들의 숙소로 이용되어지다가 남자 숙소를 지어 나가자 성지고 학생들의 숙소가 부족하여 남학생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일제시대에는 곡식을 감추어두기 위하여 천정을 올라갈 수 있는 조그만 통로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막아져 있다. 성지 사업회에서 외형의 모습과 아울러 내부의 공사도 같이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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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대영산 대학은 현재 익산의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와 더불어 교단 교역자 양성의 교육기관이다. 1922년(원기 9년 익산에 총부를 정하고 불법연구회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사용하였고, 이 해에 성지 영산에는 영산지부가 서울지부와 더불어 최초의 교당으로 발족하였다. 영산선원(영산대학의 전신은 1927년(원기 12년에 처음 영산학원으로 발족하여 정산종사와 주산종사가 1943년(원기 28년까지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었다. 일제 말의 혼란으로 수년간 중단했다가, 1947년 (원기 32년에 이군일, 박제봉 교무의 지도로 다시 개원했으나 6·25사변으로 다시 쉬지 않을 수 없었고, 1952년에 이중하 교무의 지도로 다시 개원했다가 1957년(원기 42년 영산재방언 공사로 휴원할 수 밖에 없었다. 반세기의 역사를 통하여 교단의 동량들을 길러오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중단되기 세 번, 그야말로 민족의 수난사와 교단의 수난사를 함께 호흡하였다. 그러다 다시 발족한 것은 1964년(원기 49년 3월 1일이다. 당시 종법사이셨던 정산종사님의 뜻을 받들어 중앙선원, 동산선원과 함께 3대 선원으로 힘찬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이때 중등반과 고등반 각 2년제로 병설 개원되어 교역자 양성의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다. 영산 선원 초대 원장에 안이정 교무가 부임하여 선원발전의 기초를 형성해감에 따라 영산학원은 영산선원 개원 이전까지 어려움 속에서도 초기 교단 인재 양성을 배출하고 또한 지역 사회의 문맹퇴치 등 영광 백수지역의 학교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한편 원기 52년부터는 선풍 조짐을 위해 중등반 신입생을 선발하지 않고 고등반 2년제를 초등 선원으로 제도 학정을 해나갔다. 원기 54년 3월 제 2대 오종태교무가 원장에 부임하여 그간 합산 운영되어오던 총부 영산 출장소와 영산지부(교당, 영산 선원을 각각 독립기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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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원원기 8년 영산선원(영산대학의 전신 기지를 건설하면서 현재의 영산출장소 자리에 새로운 터를 마련하고 구간도실 건물을 옮겨 짓고 영산원이라 하였다. 이 집은 구간도실의 집을 뜯어 옮겨 일부 보수와 개조를 하여 영산원(靈山院이라 이름 붙었다. 원기 9년(1924년 익산에 총부를 건설한 뒤 영광지부(영산출장소를 설치하고 방언답을 관리하고 영산지역의 교화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원기 12년부터는 영산학원을 개설하여 교단의 초기 인재를 양성하여 왔다.<사진 1>은 영산원에서 법을 설하실제 중앙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여학생이, 좌측에는 남학생이 있었다. 현재 영산원의 좌측에 학원실이 있는 것처럼 우측에도 [ㄱ]자 모양의 식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알아볼 수 없다. 또한 [불법연구회영광지부]라는 간판이 있는 부분을 보면 현재의 모습과는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2>는 초가가 아닌 기와를 올린 모습을 하고 있으며 정문에 문을 달아 둔 것을 볼 수 있다. 장마 때 자꾸 비가 세니까 기와를 올렸으며 이때 현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어떤 특정 이유로 인하여 사적지 모습의 변화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류가 있게되는 계기가 된다. <사진 3>은 기와를 얹고 유리창을 달은 모습이다. 그러다가 1986년 8월 공중을 얻어 당시 모습으로 다시 개수, 개량해 만들었고 현관의 모습도 없이 마루로 고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되어져 있다. 현재의 모습은 처음에 소개된 사진과 같다. 지금의 [영산원] 모습은 구간도실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하지만 그 이전의 모습을 유추해 본다면 과연 현재 구간도실의 형태가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다시금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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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모 전성지 장엄사업의 일환으로 대종사 탄생가 복원과 함께 건립되어 원기 66년(1981 5월 19일 준공 봉고식을 가졌다.영모전은 영산출장소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건축 양식은 고유 한옥으로 1.2m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지었다. 앞면이 17.2m측면 10m의 82평 시멘트 건물이다. 영모전 안에는 전면에 4단의 불단을 조성하고 소태산 대종사 이하 역대 선진들의 합동위패 12개가 모셔져 있다. 왼쪽 벽에는 가로 95cm 세로 128cm의 소태산 대종사 대형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영정 옆으로는 정승섭 화백이 7년의 각고 끝에 완성한 소태산 대종사 십상도(十相圖가 모셔져 있다. 십상도는 동양화 색채화로 가로 120cm 세로 157cm이다. 십상도 진열은 왼쪽 벽으로부터 관천기의상, 삼령기원상, 구사고행상, 강변입정상, 장항대각상이 있고, 오른쪽 벽에는 영산방언상, 혈인서천상, 봉래제법상, 신룡전법상, 계미열반상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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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동 집터구호동 집터는 영산 출장소에서 서남쪽으로 약 1Km 가량, 탄생가에서 약 0.6Km 떨어져 있는 곳으로 노루목에서 마당 바위로 가는 길목에 있다. 동네 이름을 구호동이라 한 것은 주위를 둘러싼 산세가 흡사 아홉 호랑이가 버틴 형세라 해서 구호동(九虎洞이라 하기도 하고 구수산에 살고 있는 호랑이가 이 골짜기로 잘 드나 들은 데서 구호(口虎라기도 하며, 또는 예전부터 있던 동네라서 구동(舊洞이라고도 한다. 이 곳에서 대종사가 15세부터 20세 되던 해까지 유년 시절을 보내신 곳이며, 영촌 탄생가와 같은 4간 겹집(방 두칸, 부엌과 광, 외양간이나 탄생가보다 훨씬 잘 지어진 집이다. 또 15세 때 이 곳에서 부모님의 명에 의해 전남 영광군 백수면 홍곡리 장기촌의 규수 제주 양씨(양하운 대사모님와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 19세 되던 해, 1월 23일 (음 1월 2일 에는 장녀(박길선: 주산 종사 부인를 얻어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한편 1910년 11월 30일(음력 10월 29일 대종사 20세시 부친 박성삼옹께서 별세하자 심적 변화를 일으켰던 곳이기도 하다. 한편 대종사는 전일에 산신령을 만나고자 했던 결심이 이 곳 구호동 집에서 도사를 만나려는 계기로 이루어진다. 대종사 결혼한 이듬해 (1906 1월 말경 새해 인사차 장기촌 처가에 갔다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고대소설 조웅전(趙雄傳과 박태부전(朴太簿傳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내용은 주인공이 도사를 만나 공부한 결과 탁월한 정신력을 얻어 소원을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종사는 전일의 생각을 돌려서 구사고행(求師苦行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도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진 구호동 집은 구호동 일대가 6. 25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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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 탄생가구수산의 한 줄기가 안으로 감아 돌며 마치 코끼리 형상의 상여봉을 이르고 이어 힘차고 아담하게 한 봉우리로 솟아 있는데 마치 처녀가 곱게 머리를 땋아 내리고 촛대봉에 불을 밝히고 글 읽는 모양이라 하여 옥녀봉이라 한다. 또한 이 산을 성인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법성포를 바라보고 있다하여 망성봉이라 하기도 한다. 옥녀봉과 상여봉을 뒤로 하고 남양받이에 십여 호의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여기가 대종사가 태어난 영촌마을이다. 상여봉의 지맥이 옥녀봉에 이어지면서 한 줄기 남으로 뻗어 내리는 곳에 대종사가 탄생한 집터가 자리하고 있다. 한말의 풍운이 휩쓸던 1891년 5월 5일(고종 28년 신묘년 음 3, 27 원불교를 창건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는 아버지 박성삼공과 어머니 유씨(법명 정천의 3남으로 탄생하였다. 어릴 때의 이름은 진섭이라 했고, 이 곳에서 14(1904세까지 성장하면서 대각의 관건이 된 우주와 인간의 근원에 관한 의문을 내신 관천기의상을 나툰 곳이다. ‘구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왜 친한가?’,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등으로 시작된 의문은 점차 진리에 대한 큰 의문으로 뭉쳐졌고 그러한 의문들을 풀기 위해 집에서 4Km 떨어진 구수산 줄기 험준한 산중턱 삼밭재 마당바위로 산신령을 만나기 위한 기도를 다니면서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대종사 11세(1901년때 여름, 영촌 마을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범람하여 온 동네가 물에 잠기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산 밑에 있는 대종사의 집도 침수되어 이사가기로 작정하고 구호동에다 새 터를 잡고 집 지을 준비를 하게 되었으며 대종사 15세(1905되던 해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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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밭재 마당바위삼밭재는 구호동에서 구수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로 마전령(麻田嶺이라 전하기도 하고 삼령(參嶺이라 하기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나 옛 지도에 베짜는 삼밭을 뜻하는 삼전(參田으로 표기되어 있고 마을 사람들은 산삼이 있었다는 전설에 의해 삼전을 뜻하는 삼밭재라 하기도 하다. 이곳은 일명 개미절터라 하는데 가야암이 개아미절로 변음 되다가 개미절터라 부른 듯 하다. 지금도 이곳엔 기와 파편 등이 흩어져 있고 여기저기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고 넓은 바위가 있는데 크기가 시골집 마당 하다하여 마당바위라 부른다. 탄생가에서 서쪽으로 4킬로미터로 떨어진 구수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종사가 소년시절인 11세 늦가을부터 15세까지 만 4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산신을 만나기 위해 기도를 올린 바위로서, 마당바위 가는 길은 탄생가에서 독다리(영촌과 구호동 사이에 있는 작은 부락를 지나 구호동 뒤 골짜기를 타고 개암골로 들어가면 큰 정자나무 샘터가 나온다. 큰 정자나무 옆에 샘터는 비교적 양지바르고 아늑한 곳으로 대종사 20세시 무렵부터 의식을 돈망하는 때가 많아 주위로부터 폐인의 취급을 받을 때, 구호동에서 살던 부인 양씨는 이 샘터에서 대종사를 위해 지극한 정성을 모으기도 했던 곳이다. 11세 되던 가을 아버지를 따라 선영의 묘소가 있는 군서면 마읍리에 시제를 모시러 갔다가 산신제를 지내는 것을 보고 어른들께 여쭈어 산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집에 돌아온 대종사는 산신을 만나서 사람들이 모르는 모든 문제를 알고 소원을 성취하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대종사는 산신제의 장소를 마당 바위로 정하고 서당에 간다 하고는 삼밭재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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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포선진포 입정터는 영산 출장소에서 산길로 와탄천을 따라 1Km쯤 가면 바위옆에 큰 정자나무가 서 있는 나루터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 바로 대종사가 구도시절 영산에서 법성장에 가다가 반나절이나 입정 상태로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집도 없고 나룻배도 없이 비석 하나만 서있지만 옛날엔 입암동을 건너 법성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였고, 짐을 운반하는 큰 배가 드나드는 포구로 일제 때만 해도 일본인 지주들이 선자를 거두어들여 군산이나 목포로 운반할 때는 이곳을 이용하는 곳으로, 영광지방의 곡물과 특산물을 실어 나르는 포구로 주막과 창고가 4동이나 있는 상당히 큰 포구였으며, 이 곳 선진나루는 길룡리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옛날에는 길룡리에서 읍내로 나가려면 산길 소로를 타고 백두계재를 넘어 만곡에서 영광이나 백수로 가거나, 선진포를 건너 입정리를 돌아 법성으로 나가게 되었다. 더러는 4Km쯤 산길을 걸어 한시랑이로 가서 구수미나루를 건너 법성에 가기도 하나 대부분 선진 나루를 이용하였다. 행정구역으로는 백수에 속하나 길룡리 뿐만 아니라 장산리, 구수리 사람들은 물 건너 법성이 물자도 풍부하고 내왕하기도 편리하여 법성을 이용하였다. 지금은 영광읍과 길룡리를 잊는 도로개설로 나루터 흔적만 남아 있다. 대종사는 20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하고 망극의 슬픔 속에서도 의심은 더욱 큰 무게로 가슴을 누르니 ""장차 이일을 어찌할꼬""하는 절망감 속에 가끔 골똘한 생각에 잠기면 모든 의식을 놓은 듯 정에 빠져들곤 하였다. 하루는 법성장에 간다고 선진포에 나가서 나룻배를 기다리다가 그대로 정에 들어 버렸다. 한나절이 지나 장에 돌아오던 동리 사람들이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대종사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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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영바위대각지에서는 동남쪽으로 300미터쯤 가면 큰 팽나무, 귀목나무들이 아름드리 거목으로 서 있고 숲에 둘러싸여 있는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귀용의 형상이라 해서 귀룡바위인데 바람들이 부르기는 귀영바위라 한다. 대종사는 가끔 이 바위 안에서 정에 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영산 성지를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사적지로 현재 영산성지 고등학교 앞 길가 정자나무 아래에 있는 큰 바위 밑에 그 집이 있었다. 이 바위 아래 조그마한 초가에서 대종사는 22세부터 23세를 전후하여 살았다. 20세시 부친의 별세로 인해 대종사는 커다란 충격과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때까지 생활에 대한 책임이 없어 구도에만 전념할 수 있었으나 아버지의 열반으로 인하여 늙으신 모친과 처자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며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신 관계로 부친 생전에 정리하지 못한 채무를 상환하여야 하는 일들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 계실 때부터 대종사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비로소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영광읍, 법성포, 무장 등지의 5일장에 나가 장사도 하였다. 하지만 빚 독촉에 계속 시달리자 귀영바위에 살면서 부친과 아주 절친한 김성서씨는 그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방안이라는 것이 주막을 차려 돈을 벌어 빚을 갚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귀영바위 앞터는 당시 흙을 파다쓰고 푹 꺼진 땅이라는 뜻으로 [흙구덩이 터]라 하는데 이 흙구덩이 터는 법성포나 구수미로 가기 위해 강변나루로 가는 길손이며 선진포로 가는 길손들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이원화 할머니를 만나 같이 장사를 하는 것도 바로 이곳이다. 영광 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