荣山圣地 – 查看历史遗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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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목영산 출장소에서 남서쪽으로 약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노루목은 중앙봉(혈인 기도때 아홉 봉오리 중앙에 위치한 정산종사 기도봉 아래에 있는 조그마한 고개를 말한다. 마치 노루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목부분에 해당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노루목]이라 한다. 노루목하면 일반적으로 대각을 이룬 곳이라고 생각을 하고 또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대종사가 23세 되던 해 여름 장마비에 귀영바위 집이 무너지게 되었고 새 집을 지을 여력이 없어서 비어있는 집으로 이사간 것이 바로 노루목 집이다. 이 노루목 집에서 2년 남짓 살게되는데 겨우 집 모양만 갖춘 삼간 오두막집 한 채 뿐이었다. 몇 해를 개초하지 않아 지붕은 썩을 대로 썩어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고 가랑비가 내려도 방안에 스미기 일쑤였다. 이 노루목 집은 삼칸 오두막집으로 길룡리 집들의 구조가 대개 그러하듯이 큰방 간, 부엌 1간, 외양간과 거기에 달린 작은방 1간하여 3간 집이다. 부엌과 외양간이 [ㄴ]자 형으로 연결된 것이 특성이고 그 안쪽에 작은 방이 있다. 대종사는 대각을 하고 더 이상 노루목에 머물지 않았다. 몇 해 동안 개초를 하지 않아 빗물이 새는 노루목 집은 거의 해체되고 이듬해 영촌 구간도실 옆으로 옮겨 살다가 그후 원기 3년 겨울에 새집(조합실을 지어 그곳에서 살았다. 이 노루목 집은 1918년에 영촌의 김봉서씨가 집을 지으며 아직 쓸만한 나무를 가져다 탄생가 옆에 집을 지었으나 그마저 6,25때 소실되었다. 대종사는 이곳에서 장차 이일을 어찌할꼬?하는 생각마저 다 잊고 무분별, 무감각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상태는 점점 심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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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제각소태산 대종사는 1916년 4월 2일,26 년간의 구도끝에 대각을 이루었으나 인근의 지식인 몇 몇이 와서 문을 할 뿐 어리 석은 대중들은 이 세상을 구원할 새 주세불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대종사는 우매한 대중들을 깨우치기위하여 당시 영광일대를 휩쓸고 있던 증산교의 천제를 임시방편으로 삼아 대중들에게 대각하였음을 증험하기로 하고 7월 옥녀봉에서 천제를 올렸다. 천제에 모인 40여명은 천제를 올리고 난 후 대종사가 보여준 몇 가지 이적을 보고는 하늘의 뜻을 받은 어른이라고 고개를 숙이며 따르게 되었다. 이렇게 최초의 제자 40여명이 되었으나 이들을 교화시킬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침 현 영산 출장소에서 500미터 가량 떨어진 돛드레미(범현동이란 이름은 일제가 개명한 이름이다는 행정상으로 길룡리 내에 있는 마을이다. 돛드레미 이씨제각은 이곳에 있는 전주이씨의 제각으로(제각의 관리는 팔산종사가 하였고 법을 설한 곳은 맨 오른쪽 방이다 대종사 대각후에 사람들을 모아서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최초법어로 설하고 교화를 시작한 처음 장소이다. 제일 처음 내린 [최초법어]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 진화의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을 이 곳에서 한 것이다. 대종사는 대각후 외모에는 변화가 일어나 그간의 병은 없어지고 얼굴이 윤활하여진 안광(顔光이 빛나서 사람들이 놀란 정도로 변하였고 하시는 말씀도 보통 사람들의 뜻밖의 말씀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폐인으로 생각했던 처지라 대종사를 참으로 알아보는 사람을 그리 많지 않았다. 대종사는 그간 믿고 따르는 사십 여 명의 제자 가운데서 신심이 굳은 여덟 사람을 먼저 골라서 표준제자로 삼고 이 아홉 사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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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평영산출장소 앞에 펼쳐진 들판으로 교단 초창기에 대종사님과 9인 선진께서 이룩한 간척답이다. 대종사는 당시의 일반적인 풍조였던 허황된 미신을 타파하고 구세주의 출현을 통한 구원만을 추구하던 민중들에게 허례폐지, 미신타파, 금주금연 등의 생활운동 전개와 저축조합운동 등을 통한 근검저축, 협동단결 정신을 실질적으로 보여준 것이 간척사업이다. 정부나 외부의 도움과 협조를 받지 아니하고 순수한 조합원들의 노력과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당시 길룡리에는 논을 구경할 수 없었는데 이 정관평으로 인해 비로소 논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 경지 정리를 시작할 즈음에 조합원에게 각각 할당해 주었고 개간한 당인의 소작지로 사용하게 하였다. 이 방언답을 처음엔 구호농장이라고도 부르다가 후에 정관평이라 하였다. 구호농장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구호동의 이름을 따서 구호농장이라 하였다는 의견도 있고 아홉 조합원이 일심단결의 정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미정이다. 다만 이 구호농장이 정관평이라 불리게 된 시기는 원기 19년 10월 {회보} 12호 [영광지부 각지 상황]에 [정관평]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정관평이라는 이름은 대종사 당대에 지어진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정관평의 [정관]이란 당나라 태종시의 연호로 태평성대를 노래한데서 유래되었으며 일원의 광대무량한 낙원세계 건설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방언공사는 두 차례에 이루어졌는데 1차 방언 공사는 원기 3년(1918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년간 둑의 길이 1,632m, 면적 4만 1천 89평으로 큰 언답 200마지기와 작은 언답 30마지기가 이루어졌으며 대종사 당대에 9인 제자와 함께 이룬 간척답이다. 2차 방언공사는 정산종사가 주도한 것으로 원기 40년 (1955부터 3년에 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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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명바위제명바위는 옥녀봉 아래에 있는 바위로써 대종사와 8인 제자들의 정관평 방언 공사를 마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 칠산 종사의 제언으로 3m정도의 높이 자연석 바위에 석회를 판처럼 바르고 간척공사 기간과 실시원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이다. 가로 90cm, 세로 45cm의 판에 김성섭(팔산 김광선의 글씨로 오른쪽에서부터 세로 글씨로 음각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靈光 白岫 吉龍 干瀉地 兩處 組合員 / 朴重彬 / 李仁明 / 金成燮 / 劉成國 / 吳在謙 / 金聖久 / 李載 / 朴漢碩 / 大正七年四月四日始 / 大正八年三月二十日終]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제명바위가 세워진 시기를 놓고 이견이 있으니, 제명바위는 방언공사가 끝나고 바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견이다. 앞의 내용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사는 끝났다 하여도 여러 문제점이 있었고 조합의 형편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또 당시에는 석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정관평 수문을 만들고 남은 시멘트를 이용해 만들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럴듯하게 이해가 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의심점이 따른다. 즉 원기 6년 이후라 할 것 같으면 이미 법명을 사용하였을 것인데 법명이 아닌 속명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또다른 내용은 방언공사가 마쳐진 후 바로 이어졌다는 의견이다. 즉 제자들의 이름이 모두 속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까닭은 방언공사 마치고 난 뒤 법인성사가 이루어진 뒤에야 대종사께서 법명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 의견이 있으나 필자는 전자에 뜻이 기울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