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성지-사적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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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종사 탄생가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 소재, 정산종사가 부친 송벽조 정사와 모친 이운외 정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집이며, 주산 송도성 종사도 이 집에서 태어났다. 정산종사는 9세까지 이 집에서 자랐다. 마을 뒷산은 달마산으로 장삼을 걸친 달마대사가 앉아있는 것 같은 큰 바위가 정상에 솟아 있어 바위 이름도 달마바위며 산 이름도 이에 연유되어 붙여진 불연(佛緣)의 고장이다. 본채는 5간 흩집으로 지붕은 볏짚 이엉을 얹었으나 새마을 사업으로 골격을 그대로 두고 지붕은 스레트로 개조하였다. 사랑채는 기와집으로 아직 원형대로 남아 있는데 사랑채에서 정산종사가 조부 송훈동선생으로부터 한문을 익혔으며 8세시부터 본격적인 한학공부를 했다. 바로 옆에는 동리 당산제를 지내는 느티나무가 있고 동리사람들 모임터가 있다. 마을 옆으로 큰 내가 흐르고 있으며 정산종사가 이사하여 성장하신 소야 성장지와 도를 얻으신 [소성구도지]비가 세워져 있는 박실마을은 1km쯤 떨어져 있다. 정산종사의 부친 송벽조의 집안은 대대로 선조들이 살아오던 고산정에서 생활하다 첫 아이를 낳기 전, 고개 둘을 넘어 소성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당시 소송동에는 송벽조의 외가인 전주 이씨들이 한약방을 하며 살고 있었다. 또한 소성동 사람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고산정 마을의 선비를 모시려는 까닭으로 인해 고산정에서 소성동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뒷날 정산종사는 소성동의 풍경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천하를 서로 사양하고, 제후들은 서로 아홉 고을을 사양하매, 그 화가 지극하면 천하에 충만한지라. 그 전경을 풍류에 올린즉 봉황이 춤을 추었다. 그러므로 인화는 양보로써 이루어지고,화가 지극하면 천하의 기운이 따라서 통해지는 것이다. " 소성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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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 성주지정산종사 9세시까지 탄생가에서 성장하였고 그 후 200미터 떨어진 소야로 이사하였다. 정산종사 이때부터 도를 구하기 위한 단계에 들어선다. 정산종사 다음과 같은 회고담이 전한다. [10세를 전후해서 있었던 일로 기억된다. 그때는 정말 모든 것이 궁금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천하의 큰 일을 해야 할 것인데 뜻과 같이 되지 않으니 답답함은 가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 모든 것을 잊는 것은 물론 답답함도 풀린다는 말을 듣고, 정말 모든 것을 잊는 것은 물론 답답함도 풀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집에서 만든 동동주를 5사발 정도나 마셨는데 근심은 더하고 머리는 지근거리며 몸은 중심을 잡기가 어렵기만 하더라 술 먹으면 모든 것 잊고 답답함도 풀린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11세 경부터 사서를 공부할 때 한 나라를 바로세우는 큰 인물이 되고자 했던 생각이 "대장부가 어찌 한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에서 만족할 수 있으랴, 천하창생을 널리 구제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건설하리라"고 생각이 다시 바뀌게 되었다. 정산종사는 10세를 전후해서 제생의세 성불제중의 큰 서원이 확립된다. 정산종사 12세경에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었다. 지수만물무피차 천강조민유비존 유연즉시일시남 문무겸전기불난 地輸萬物無彼此 天降兆民有卑尊 劉淵卽是一時男 文武兼全豈不難 지상에 실린 만물 너와 내가 없었건만 하늘이 내린 백성 높낮음이 있어졌네 유연은 한 시대를 주름잡던 사나이나 문무를 겸전하기가 어찌 어렵지 아나하랴 정산종사는 13세에 성주군 금수면 광산동에 거주하는 여씨가의 청운과 결혼을 했다. 정산종사 이 즈음해서 성숙된 구도열정이 생활의 축이 된다. 즉 본격적인 구도가 시작된 것이다. 결혼 후 소야에서 박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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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실구도지정산종사 13세 되시던 해 봄에 여청운과 결혼을 하게 되자 부친 송벽조는 새로 집을 지어 박실로 이사하게 되었다. 소야 성장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초전면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정산종사는 비록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은 했지만 가정생활은 거의 관심이 없었고 다만 구도에 대한 열정만 더해갔다. 박실마을 집 뒷뜰에 거북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정산종사는 "후일에 천하 창생을 제도하는 사업을 이뤄서 그 빛난 이름이 영원한 세상에 유전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정산종사는 밤에는 거북바위에서 이렇게 기도를 올리고 낮에는 [사략]이라는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의사와 포부를 나타내는 [장부회국론]이라는 긴 글을 짓기도 하였다. 그 뜻은 "대장부가 이 세상에 출세하여 마땅히 공중사에 헌신봉공하여 그 은혜가 천하만민에게 골고루 미쳐가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갓 구구한 가정생활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이다"는 것이었다. 현재 이 글은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정산종사는 거북바위 기도를 상당히 계속하였으나 별 효과가 없자 집안에서 올리면 효과가 있을까 생각하여 방안에 [천문도]와 [지도서]를 그려놓고 천문도를 향해 하늘 기운이 응하기를 빌고 지도서를 향해 땅 기운이 응하기를 빌었다. 이러한 기도에도 별 감응을 얻지 못하던 중 정산종사는 처가에서 가야산의 여처사 이야기를 듣고 가야산으로 구도를 떠나기도 하였다. 두 번의 가야산행에서 여처사를 만나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세 번째의 가야산행에 도꾼들을 만나 전라도로 스승을 찾아 떠날 것을 결심하게 되고 정산종사는 전라도로 떠나게 된다. 지금 이곳엔 거북바위가 아직도 정산종사의 구도일념을 대변해 앉아있고 중앙문화원에서 박실 구도지비를 세워 기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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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정과 백세각야성 송씨 30대 손인 정산종사는 살아 생전에 당신 고향을 묻는 이 있으면 [성주 고산성]이라 했다. 고산정은 야성 송씨의 집성촌으로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이다. 정산종사 부친 송벽조가 결혼 때 까지 살던 곳이며 역대 선조들이 대대로 세거하였고 오늘날까지 종친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정산종사 조부에게 유학을 배웠으나 14세경부터는 일년에 한 철씩 이곳 고산정에 와 공산 송준필에게 유학을 배우게 되었다. 정산종사 14대조인 송희규가 고산정에 정착하여 백세각을 짓고 학문을 닦던 이곳에서 공산 송준필은 고양서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영남지방의 거유로 이름이 나 있었고, 일생을 통해서 많은 저서와 방대한 문집을 남겼다. 고산정은 3.1운동 당시 성주지방의 항일 운동의 요람이었다. 공산 송준필이 주동한 이 운동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유림이 한명도 참가하지 않은 것을 개탄해 독립 운동에 앞장 설 것을 결의한 것이다. 이들 가운데 송준필, 송흥래 2인은 김창숙 등과 연락, 1919년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한 전국유림대표 137명의 서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했던 [유림단진정서] 작성에 앞장서 송준필은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후에 종친 10여명이 독립유공인으로 추서되었다. 송준필이 만년에 저술과 경학에 힘쓰던 김천 원계서원에 숭덕사를 짓고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백세각은 조선조 전통 목조건물로 인정되어 경북 지방문화재 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세각은 그대로 있으나 정산종사 송준필 선생으로부터 유학을 배웠던 백세각 옆 고양서당은 이젠 흔적도 없고 그 자리에 조립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정산종사가 14,5세경에 지었다는 [해붕천리 고상우(海鵬千里 고翔羽) 농학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