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성지-사적지보기
실상초당터
관련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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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
지정년도 |
상세설명 DESCRIPTION
대종사는 사산 오창건과 함께 원기 4년 3월 전북 부안군 봉래산에 있는 월명암에서 10여일 유숙한 후 다시 영산으로 돌아와 7월에 법인성사를 마치고 정산종사를 월명암으로 보내어 당시 선승으로 이름 높은 월명암 주지 백학명선사의 상좌로 있게 하였다. 그 후 저축조합의 후속 사무를 여러 제자에게 부탁하고 원기 4년 12월에 월명암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 때 송적벽, 김남천, 김혜월, 이청풍 등의 제자들이 대종사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시봉하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12월경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산내면 중계리 내변산의 직소폭포로 가는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실상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9년(689) 초의선사가 창건하고 조선조 태종 대 왕녕대군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6,25 동란 때 불에 타버려 현재는 절터만이 남아 있다) 옆편에 수간의 초당을 매입하여 거처를 정하신 후 간고한 살림을 시작하였고 이곳이 바로 [실상초당]이다.
여기에서 심신의 휴양에 전력하는 동시에 원기 5년부터 영광 김제등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조석으로 설법하였으며, 3월에는 회성곡(回性曲)이라는 가사체로 된 상,중,하편을 지었고, 4월에는 본교 교강인 사은 사요와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하였다.
특히 실상사에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실지불공의 법문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같은 해 (원기 5년) 6월에 대종사는 실상초당에서 거처함이 너무 협소하고 신도들이 내왕하는데 불편을 느껴 김남천, 송적벽 등의 발의로 봉래정사를 신축하였다. 이로 인해 대종사는 모든 사업을 놓고 수양시간을 많이 가지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법문을 많이 하였으며, 월명암 백학명선사와도 선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던 곳이다. 대종경 성리품에 보면 봉래정사에 관한 내용이 많다. 하산할 무렵에는 진안 만덕산등 여러곳을 다니면서 초창기 인연들인 최도화 박사시화, 전음광, 전삼삼, 서중안, 장적조, 이만갑, 구남수 등을 만났다.
실상초당은 실상사지에서 100m 떨어져 있었고 그 초당의 구조는 방 3간 부엌 하나로 되어 있었다. 대종사 총부건설을 위해 봉래정사를 떠나셨을 때 원기 9년(1924) 종곡리에 있던 이춘풍 일가가 이곳 초당에 살면서 봉래정사를 수호하기도 했었다. 실상초당은 6.25때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심신의 휴양에 전력하는 동시에 원기 5년부터 영광 김제등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조석으로 설법하였으며, 3월에는 회성곡(回性曲)이라는 가사체로 된 상,중,하편을 지었고, 4월에는 본교 교강인 사은 사요와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하였다.
특히 실상사에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실지불공의 법문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같은 해 (원기 5년) 6월에 대종사는 실상초당에서 거처함이 너무 협소하고 신도들이 내왕하는데 불편을 느껴 김남천, 송적벽 등의 발의로 봉래정사를 신축하였다. 이로 인해 대종사는 모든 사업을 놓고 수양시간을 많이 가지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법문을 많이 하였으며, 월명암 백학명선사와도 선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던 곳이다. 대종경 성리품에 보면 봉래정사에 관한 내용이 많다. 하산할 무렵에는 진안 만덕산등 여러곳을 다니면서 초창기 인연들인 최도화 박사시화, 전음광, 전삼삼, 서중안, 장적조, 이만갑, 구남수 등을 만났다.
실상초당은 실상사지에서 100m 떨어져 있었고 그 초당의 구조는 방 3간 부엌 하나로 되어 있었다. 대종사 총부건설을 위해 봉래정사를 떠나셨을 때 원기 9년(1924) 종곡리에 있던 이춘풍 일가가 이곳 초당에 살면서 봉래정사를 수호하기도 했었다. 실상초당은 6.25때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