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산성지-사적지보기
미륵사
관련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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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
지정년도 |
상세설명 DESCRIPTION
미륵사는 만덕산 북쪽 기슭, 진안과 완주 군계에 있는 절로 대웅전과 요사체가 소박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산신각이 새롭게 단장되어 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절이다. 그러나 한때 진묵대사가 주석했다고 전해진다.
전주-진안간 국도에서 약 4km쯤 떨어진 만덕산 7부능선에 위치해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 속한다. 만덕산 농원에서는 능선을 타고 정산에 올라 북쪽 골짜기를 따라 3km쯤 내려가는 거리에 있다.
원기 6년 변산 봉래정사에서 소태산 대종사 정산종사에게 "이제 차츰 때가 되어간다. 어디든지 네 발걸음 내키는 대로 가 보아라. 그러면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전주에는 들리지 말라"라고 하시었다. 정산종사는 스승의 말씀 받들어 전주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가는 도중 한 스님을 만나 길동무를 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간 곳이 바로 만덕산 미륵사였고 그는 미륵사 주지였다. 정산종사와 형제의를 맺고 미륵사 일을 봐주며 그 해 겨울을 나게 되었다.
이듬해 겨울, 설이 지나고 미륵사의 화주였던 비단장수가 미륵사를 찾아왔다. 그때 화주는 정산종사를 보고 마음이 쏠리어 생불님이라 받들기 시작했다. 그 뒤 미륵사에 생불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돌아 불공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정산종사는 더 이상 머물기 어렵겠다 하여 음력 2월경 소태산 대종사께 경과보고의 편지를 보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봉래정사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받고 정산종사는 미륵사를 떠나게 되었다. 이때 화주보살은 정산종사에게 비단옷을 공양하러 절에 찾았다. 그러나 이미 떠나고 없는 정산종사이기에 화주보살은 주지가 정산종사를 다른 데로 빼돌렸다며 대판 싸우기도 하였다. 보살은 결국 물어 물어 봉래정사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더욱 높은 스승이 있는 것을 보고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였다. 그때 소태산은 "방죽을 파야 고기가 모인다더니 과연 모여드는 구나"하시며 보살에게 도화(道華)라는 법명을 주었다. 이가 바로 최도화이니 전북과 서울 회상에 교화의 초석을 다진 삼타원이었다.
한편 만덕암은 최도화의 시부가 며느리를 위해 지어준 집이다. 워낙 불심이 깊었던 최도화가 미륵사와 이곳을 오가며 직접 관리하였다. 만덕암은 산신령 탱화를 모신 불당 1간, 방 1간과 부엌이 있는 3칸 기와집이었나 6.25전쟁때 소실되었다. 소태산 대종사와 12명의 제자는 바로 이곳 만덕암에서 초선을 가졌던 것이다.
전주-진안간 국도에서 약 4km쯤 떨어진 만덕산 7부능선에 위치해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 속한다. 만덕산 농원에서는 능선을 타고 정산에 올라 북쪽 골짜기를 따라 3km쯤 내려가는 거리에 있다.
원기 6년 변산 봉래정사에서 소태산 대종사 정산종사에게 "이제 차츰 때가 되어간다. 어디든지 네 발걸음 내키는 대로 가 보아라. 그러면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전주에는 들리지 말라"라고 하시었다. 정산종사는 스승의 말씀 받들어 전주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가는 도중 한 스님을 만나 길동무를 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간 곳이 바로 만덕산 미륵사였고 그는 미륵사 주지였다. 정산종사와 형제의를 맺고 미륵사 일을 봐주며 그 해 겨울을 나게 되었다.
이듬해 겨울, 설이 지나고 미륵사의 화주였던 비단장수가 미륵사를 찾아왔다. 그때 화주는 정산종사를 보고 마음이 쏠리어 생불님이라 받들기 시작했다. 그 뒤 미륵사에 생불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돌아 불공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정산종사는 더 이상 머물기 어렵겠다 하여 음력 2월경 소태산 대종사께 경과보고의 편지를 보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봉래정사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받고 정산종사는 미륵사를 떠나게 되었다. 이때 화주보살은 정산종사에게 비단옷을 공양하러 절에 찾았다. 그러나 이미 떠나고 없는 정산종사이기에 화주보살은 주지가 정산종사를 다른 데로 빼돌렸다며 대판 싸우기도 하였다. 보살은 결국 물어 물어 봉래정사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더욱 높은 스승이 있는 것을 보고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였다. 그때 소태산은 "방죽을 파야 고기가 모인다더니 과연 모여드는 구나"하시며 보살에게 도화(道華)라는 법명을 주었다. 이가 바로 최도화이니 전북과 서울 회상에 교화의 초석을 다진 삼타원이었다.
한편 만덕암은 최도화의 시부가 며느리를 위해 지어준 집이다. 워낙 불심이 깊었던 최도화가 미륵사와 이곳을 오가며 직접 관리하였다. 만덕암은 산신령 탱화를 모신 불당 1간, 방 1간과 부엌이 있는 3칸 기와집이었나 6.25전쟁때 소실되었다. 소태산 대종사와 12명의 제자는 바로 이곳 만덕암에서 초선을 가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