荣山圣地 – 查看历史遗迹
귀영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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详细说明 DESCRIPTION
대각지에서는 동남쪽으로 300미터쯤 가면 큰 팽나무, 귀목나무들이 아름드리 거목으로 서 있고 숲에 둘러싸여 있는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귀용의 형상이라 해서 귀룡바위인데 바람들이 부르기는 귀영바위라 한다. 대종사는 가끔 이 바위 안에서 정에 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영산 성지를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사적지로 현재 영산성지 고등학교 앞 길가 정자나무 아래에 있는 큰 바위 밑에 그 집이 있었다. 이 바위 아래 조그마한 초가에서 대종사는 22세부터 23세를 전후하여 살았다. 20세시 부친의 별세로 인해 대종사는 커다란 충격과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때까지 생활에 대한 책임이 없어 구도에만 전념할 수 있었으나 아버지의 열반으로 인하여 늙으신 모친과 처자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며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신 관계로 부친 생전에 정리하지 못한 채무를 상환하여야 하는 일들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 계실 때부터 대종사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비로소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영광읍, 법성포, 무장 등지의 5일장에 나가 장사도 하였다. 하지만 빚 독촉에 계속 시달리자 귀영바위에 살면서 부친과 아주 절친한 김성서씨는 그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방안이라는 것이 주막을 차려 돈을 벌어 빚을 갚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귀영바위 앞터는 당시 흙을 파다쓰고 푹 꺼진 땅이라는 뜻으로 [흙구덩이 터]라 하는데 이 흙구덩이 터는 법성포나 구수미로 가기 위해 강변나루로 가는 길손이며 선진포로 가는 길손들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이원화 할머니를 만나 같이 장사를 하는 것도 바로 이곳이다. 영광 조씨 제실에서 첫 대면을 하였는데 일곱 살이나 연상인 바랭이네는 그 덕성이 좋고 인심이 좋아서 손님이 번성하였으나 천성이 셈이 밝지 않고 외상준 것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또한 대종사는 주막의 장사는 바랭이네에 맡기도 집 앞 귀영바위 굴에 시도 때도 없이 앉아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결국 장사는 실패하게 되고 빚 독촉은 계속되자 결국 천정리에 사는 이인명(후일 대종사의 제자가 된 이산 이순순의 주선으로 [탈이섬]까지 장사를 나가서 상당한 벌이로 영광읍내에서 얻은 고리채 빚을 갚기도 했다.
그러나 채무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뒤부터 더욱 우주 진리에 대한 깊은 사색으로 생활에 대한 돈망이 더욱 깊어져 갔으며, 어찌하면 도를 이룰꼬,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하는 일념 뿐이었다. 모든 것을 잊은 채 깊은 정에 들어 있는 사이, 해마다 하는 개초도 잊고 지냈는데 한 번은 함께 탈이 파시 장사에 동행하였던 이인명이 와서 주막집의 개초를 해준 일이 있었다.
대종사 24세가 되던 여름 장마 비에 귀영바위 집이 관리 소홀로 무너지고 되었고 그래서 대종사는 노루목에 있는 초가를 구해 이사를 하였던 것이다. 당시 노루목에는 오두막집 한 채만 덩그러니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귀영바위집터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고 눈썹바위봉으로 올라가는 쪽에 당시 대종사가 자주 올라갔던 바위만 남아 있다.
자료상으로 보나 관심도로 보나 구호동 집터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이 귀영바위 집터에 대해서는 그 관심의 정도가 덜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해서 주타원 윤주현 종사는 이렇게 말한다. ""귀영바위 집은 보통 귀영바위 흙무덤이라고 하였다. 목재로 지은 집이 아니라 흙으로 만든 토굴 같은 것이지....."" 사실 그 집이 목재로 지은 집인지 토굴의 형식인 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 위치에 대한 표시 정도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영산 성지를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사적지로 현재 영산성지 고등학교 앞 길가 정자나무 아래에 있는 큰 바위 밑에 그 집이 있었다. 이 바위 아래 조그마한 초가에서 대종사는 22세부터 23세를 전후하여 살았다. 20세시 부친의 별세로 인해 대종사는 커다란 충격과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때까지 생활에 대한 책임이 없어 구도에만 전념할 수 있었으나 아버지의 열반으로 인하여 늙으신 모친과 처자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며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신 관계로 부친 생전에 정리하지 못한 채무를 상환하여야 하는 일들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 계실 때부터 대종사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비로소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영광읍, 법성포, 무장 등지의 5일장에 나가 장사도 하였다. 하지만 빚 독촉에 계속 시달리자 귀영바위에 살면서 부친과 아주 절친한 김성서씨는 그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방안이라는 것이 주막을 차려 돈을 벌어 빚을 갚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귀영바위 앞터는 당시 흙을 파다쓰고 푹 꺼진 땅이라는 뜻으로 [흙구덩이 터]라 하는데 이 흙구덩이 터는 법성포나 구수미로 가기 위해 강변나루로 가는 길손이며 선진포로 가는 길손들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이원화 할머니를 만나 같이 장사를 하는 것도 바로 이곳이다. 영광 조씨 제실에서 첫 대면을 하였는데 일곱 살이나 연상인 바랭이네는 그 덕성이 좋고 인심이 좋아서 손님이 번성하였으나 천성이 셈이 밝지 않고 외상준 것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또한 대종사는 주막의 장사는 바랭이네에 맡기도 집 앞 귀영바위 굴에 시도 때도 없이 앉아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결국 장사는 실패하게 되고 빚 독촉은 계속되자 결국 천정리에 사는 이인명(후일 대종사의 제자가 된 이산 이순순의 주선으로 [탈이섬]까지 장사를 나가서 상당한 벌이로 영광읍내에서 얻은 고리채 빚을 갚기도 했다.
그러나 채무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뒤부터 더욱 우주 진리에 대한 깊은 사색으로 생활에 대한 돈망이 더욱 깊어져 갔으며, 어찌하면 도를 이룰꼬,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하는 일념 뿐이었다. 모든 것을 잊은 채 깊은 정에 들어 있는 사이, 해마다 하는 개초도 잊고 지냈는데 한 번은 함께 탈이 파시 장사에 동행하였던 이인명이 와서 주막집의 개초를 해준 일이 있었다.
대종사 24세가 되던 여름 장마 비에 귀영바위 집이 관리 소홀로 무너지고 되었고 그래서 대종사는 노루목에 있는 초가를 구해 이사를 하였던 것이다. 당시 노루목에는 오두막집 한 채만 덩그러니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귀영바위집터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고 눈썹바위봉으로 올라가는 쪽에 당시 대종사가 자주 올라갔던 바위만 남아 있다.
자료상으로 보나 관심도로 보나 구호동 집터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이 귀영바위 집터에 대해서는 그 관심의 정도가 덜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해서 주타원 윤주현 종사는 이렇게 말한다. ""귀영바위 집은 보통 귀영바위 흙무덤이라고 하였다. 목재로 지은 집이 아니라 흙으로 만든 토굴 같은 것이지....."" 사실 그 집이 목재로 지은 집인지 토굴의 형식인 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 위치에 대한 표시 정도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