荣山圣地 – 查看历史遗迹
선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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详细说明 DESCRIPTION
선진포 입정터는 영산 출장소에서 산길로 와탄천을 따라 1Km쯤 가면 바위옆에 큰 정자나무가 서 있는 나루터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 바로 대종사가 구도시절 영산에서 법성장에 가다가 반나절이나 입정 상태로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집도 없고 나룻배도 없이 비석 하나만 서있지만 옛날엔 입암동을 건너 법성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였고, 짐을 운반하는 큰 배가 드나드는 포구로 일제 때만 해도 일본인 지주들이 선자를 거두어들여 군산이나 목포로 운반할 때는 이곳을 이용하는 곳으로, 영광지방의 곡물과 특산물을 실어 나르는 포구로 주막과 창고가 4동이나 있는 상당히 큰 포구였으며, 이 곳 선진나루는 길룡리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옛날에는 길룡리에서 읍내로 나가려면 산길 소로를 타고 백두계재를 넘어 만곡에서 영광이나 백수로 가거나, 선진포를 건너 입정리를 돌아 법성으로 나가게 되었다. 더러는 4Km쯤 산길을 걸어 한시랑이로 가서 구수미나루를 건너 법성에 가기도 하나 대부분 선진 나루를 이용하였다. 행정구역으로는 백수에 속하나 길룡리 뿐만 아니라 장산리, 구수리 사람들은 물 건너 법성이 물자도 풍부하고 내왕하기도 편리하여 법성을 이용하였다. 지금은 영광읍과 길룡리를 잊는 도로개설로 나루터 흔적만 남아 있다.
대종사는 20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하고 망극의 슬픔 속에서도 의심은 더욱 큰 무게로 가슴을 누르니 ""장차 이일을 어찌할꼬""하는 절망감 속에 가끔 골똘한 생각에 잠기면 모든 의식을 놓은 듯 정에 빠져들곤 하였다. 하루는 법성장에 간다고 선진포에 나가서 나룻배를 기다리다가 그대로 정에 들어 버렸다. 한나절이 지나 장에 돌아오던 동리 사람들이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대종사를 보고 정신을 차리게 하였다. 이곳이 바로 강변입정상을 나툰 곳이다. 이로부터 정에 드는 일이 더욱 많아졌으며 차츰 눕고 자는 일마저도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잊혀져 갔다.
선진포 입정터를 보면서 스스로 의심이 생기는데 대종사는 그 의심의 정도가 심할 때 여러 장소에서 입정에 드신다. 집에서 밥을 먹다가고 입정에 들고 서대원 선진의 {성지 순례기}에는 귀영바위 집터에서도 입정에 드셨다고 하는데 이곳 선진포만을 격상하여 십상의 일부로 넣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보여졌다 하더라도 그 당시 입정의 상태를 대각의 과정으로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을 것이요, 다만 측은의 마음이 더욱 더하였을 텐데 말이다.
또한 그처럼 중요한 입지의 곳이라면 기념비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다. 교중의 땅이 아니라 하지만 적지 않은 순례객들이 방문하는 곳인데 1m도 채 되지 않는 돌맹이에 대종사 입정의 시기도 교사적 위치도 없이 다만 [선진포 입정터]라는 문구만 있고 보니 아쉬움이 많이 든다.
지금은 집도 없고 나룻배도 없이 비석 하나만 서있지만 옛날엔 입암동을 건너 법성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였고, 짐을 운반하는 큰 배가 드나드는 포구로 일제 때만 해도 일본인 지주들이 선자를 거두어들여 군산이나 목포로 운반할 때는 이곳을 이용하는 곳으로, 영광지방의 곡물과 특산물을 실어 나르는 포구로 주막과 창고가 4동이나 있는 상당히 큰 포구였으며, 이 곳 선진나루는 길룡리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옛날에는 길룡리에서 읍내로 나가려면 산길 소로를 타고 백두계재를 넘어 만곡에서 영광이나 백수로 가거나, 선진포를 건너 입정리를 돌아 법성으로 나가게 되었다. 더러는 4Km쯤 산길을 걸어 한시랑이로 가서 구수미나루를 건너 법성에 가기도 하나 대부분 선진 나루를 이용하였다. 행정구역으로는 백수에 속하나 길룡리 뿐만 아니라 장산리, 구수리 사람들은 물 건너 법성이 물자도 풍부하고 내왕하기도 편리하여 법성을 이용하였다. 지금은 영광읍과 길룡리를 잊는 도로개설로 나루터 흔적만 남아 있다.
대종사는 20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하고 망극의 슬픔 속에서도 의심은 더욱 큰 무게로 가슴을 누르니 ""장차 이일을 어찌할꼬""하는 절망감 속에 가끔 골똘한 생각에 잠기면 모든 의식을 놓은 듯 정에 빠져들곤 하였다. 하루는 법성장에 간다고 선진포에 나가서 나룻배를 기다리다가 그대로 정에 들어 버렸다. 한나절이 지나 장에 돌아오던 동리 사람들이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대종사를 보고 정신을 차리게 하였다. 이곳이 바로 강변입정상을 나툰 곳이다. 이로부터 정에 드는 일이 더욱 많아졌으며 차츰 눕고 자는 일마저도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잊혀져 갔다.
선진포 입정터를 보면서 스스로 의심이 생기는데 대종사는 그 의심의 정도가 심할 때 여러 장소에서 입정에 드신다. 집에서 밥을 먹다가고 입정에 들고 서대원 선진의 {성지 순례기}에는 귀영바위 집터에서도 입정에 드셨다고 하는데 이곳 선진포만을 격상하여 십상의 일부로 넣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보여졌다 하더라도 그 당시 입정의 상태를 대각의 과정으로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을 것이요, 다만 측은의 마음이 더욱 더하였을 텐데 말이다.
또한 그처럼 중요한 입지의 곳이라면 기념비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다. 교중의 땅이 아니라 하지만 적지 않은 순례객들이 방문하는 곳인데 1m도 채 되지 않는 돌맹이에 대종사 입정의 시기도 교사적 위치도 없이 다만 [선진포 입정터]라는 문구만 있고 보니 아쉬움이 많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