荣山圣地 – 查看历史遗迹
소태산 대종사 탄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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详细说明 DESCRIPTION
구수산의 한 줄기가 안으로 감아 돌며 마치 코끼리 형상의 상여봉을 이르고 이어 힘차고 아담하게 한 봉우리로 솟아 있는데 마치 처녀가 곱게 머리를 땋아 내리고 촛대봉에 불을 밝히고 글 읽는 모양이라 하여 옥녀봉이라 한다. 또한 이 산을 성인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법성포를 바라보고 있다하여 망성봉이라 하기도 한다. 옥녀봉과 상여봉을 뒤로 하고 남양받이에 십여 호의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여기가 대종사가 태어난 영촌마을이다. 상여봉의 지맥이 옥녀봉에 이어지면서 한 줄기 남으로 뻗어 내리는 곳에 대종사가 탄생한 집터가 자리하고 있다.
한말의 풍운이 휩쓸던 1891년 5월 5일(고종 28년 신묘년 음 3, 27 원불교를 창건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는 아버지 박성삼공과 어머니 유씨(법명 정천의 3남으로 탄생하였다. 어릴 때의 이름은 진섭이라 했고, 이 곳에서 14(1904세까지 성장하면서 대각의 관건이 된 우주와 인간의 근원에 관한 의문을 내신 관천기의상을 나툰 곳이다.
‘구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왜 친한가?’,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등으로 시작된 의문은 점차 진리에 대한 큰 의문으로 뭉쳐졌고 그러한 의문들을 풀기 위해 집에서 4Km 떨어진 구수산 줄기 험준한 산중턱 삼밭재 마당바위로 산신령을 만나기 위한 기도를 다니면서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대종사 11세(1901년때 여름, 영촌 마을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범람하여 온 동네가 물에 잠기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산 밑에 있는 대종사의 집도 침수되어 이사가기로 작정하고 구호동에다 새 터를 잡고 집 지을 준비를 하게 되었으며 대종사 15세(1905되던 해 드디어 구호동 새 집으로 이사하였다. 그후 이 집에서는 대종사의 외삼촌 칠산 유건 대호법이 살았는데 6.25전란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현재의 탄생가는 영촌마을에 살고 있는 대종사의 이종사촌인 최복경(崔福京옹의 고증을 얻어 복원한 것으로 원기 66년(1981 영산 성지사업회가 대종사 이 땅에 오신지 90년이 되던 해를 기념하여 탄생가를 복원하여 지금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대지 148평 건평 16평 초가 4간 네줄박이 집으로 남향집으로 되어 있다.
탄생가 복원에 있어 그 이질성이 느껴지는 것은 집이 너무 잘지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없는 사람의 옹색함이 아니라 복원을 위한 마음먹고 개량한 것이다. 당시 길룡리에는 논이 없었고 그 생활 또한 넉넉한 살림이 아니였으리만 마루의 높이며 집의 장엄이 당시의 모습과는 아주 다른 인상을 준다. 이에 대해 “집이라도 잘지어 놓는 것이 대종사의 은혜에 조금이라고 보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는 회고한 내용을 본다면 과연 사적지의 올바른 인식의 문제가 대두되어야 한다고 본다.
한말의 풍운이 휩쓸던 1891년 5월 5일(고종 28년 신묘년 음 3, 27 원불교를 창건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는 아버지 박성삼공과 어머니 유씨(법명 정천의 3남으로 탄생하였다. 어릴 때의 이름은 진섭이라 했고, 이 곳에서 14(1904세까지 성장하면서 대각의 관건이 된 우주와 인간의 근원에 관한 의문을 내신 관천기의상을 나툰 곳이다.
‘구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왜 친한가?’,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등으로 시작된 의문은 점차 진리에 대한 큰 의문으로 뭉쳐졌고 그러한 의문들을 풀기 위해 집에서 4Km 떨어진 구수산 줄기 험준한 산중턱 삼밭재 마당바위로 산신령을 만나기 위한 기도를 다니면서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대종사 11세(1901년때 여름, 영촌 마을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범람하여 온 동네가 물에 잠기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산 밑에 있는 대종사의 집도 침수되어 이사가기로 작정하고 구호동에다 새 터를 잡고 집 지을 준비를 하게 되었으며 대종사 15세(1905되던 해 드디어 구호동 새 집으로 이사하였다. 그후 이 집에서는 대종사의 외삼촌 칠산 유건 대호법이 살았는데 6.25전란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현재의 탄생가는 영촌마을에 살고 있는 대종사의 이종사촌인 최복경(崔福京옹의 고증을 얻어 복원한 것으로 원기 66년(1981 영산 성지사업회가 대종사 이 땅에 오신지 90년이 되던 해를 기념하여 탄생가를 복원하여 지금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대지 148평 건평 16평 초가 4간 네줄박이 집으로 남향집으로 되어 있다.
탄생가 복원에 있어 그 이질성이 느껴지는 것은 집이 너무 잘지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없는 사람의 옹색함이 아니라 복원을 위한 마음먹고 개량한 것이다. 당시 길룡리에는 논이 없었고 그 생활 또한 넉넉한 살림이 아니였으리만 마루의 높이며 집의 장엄이 당시의 모습과는 아주 다른 인상을 준다. 이에 대해 “집이라도 잘지어 놓는 것이 대종사의 은혜에 조금이라고 보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는 회고한 내용을 본다면 과연 사적지의 올바른 인식의 문제가 대두되어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