荣山圣地 – 查看历史遗迹
삼밭재 마당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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详细说明 DESCRIPTION
삼밭재는 구호동에서 구수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로 마전령(麻田嶺이라 전하기도 하고 삼령(參嶺이라 하기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나 옛 지도에 베짜는 삼밭을 뜻하는 삼전(參田으로 표기되어 있고 마을 사람들은 산삼이 있었다는 전설에 의해 삼전을 뜻하는 삼밭재라 하기도 하다.
이곳은 일명 개미절터라 하는데 가야암이 개아미절로 변음 되다가 개미절터라 부른 듯 하다. 지금도 이곳엔 기와 파편 등이 흩어져 있고 여기저기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고 넓은 바위가 있는데 크기가 시골집 마당 하다하여 마당바위라 부른다.
탄생가에서 서쪽으로 4킬로미터로 떨어진 구수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종사가 소년시절인 11세 늦가을부터 15세까지 만 4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산신을 만나기 위해 기도를 올린 바위로서, 마당바위 가는 길은 탄생가에서 독다리(영촌과 구호동 사이에 있는 작은 부락를 지나 구호동 뒤 골짜기를 타고 개암골로 들어가면 큰 정자나무 샘터가 나온다. 큰 정자나무 옆에 샘터는 비교적 양지바르고 아늑한 곳으로 대종사 20세시 무렵부터 의식을 돈망하는 때가 많아 주위로부터 폐인의 취급을 받을 때, 구호동에서 살던 부인 양씨는 이 샘터에서 대종사를 위해 지극한 정성을 모으기도 했던 곳이다.
11세 되던 가을 아버지를 따라 선영의 묘소가 있는 군서면 마읍리에 시제를 모시러 갔다가 산신제를 지내는 것을 보고 어른들께 여쭈어 산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집에 돌아온 대종사는 산신을 만나서 사람들이 모르는 모든 문제를 알고 소원을 성취하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대종사는 산신제의 장소를 마당 바위로 정하고 서당에 간다 하고는 삼밭재에 올라 산신을 만나기 위해 정성을 드린다. 산신을 만나려는 염원은 점점 깊어 간절한 기도가 시작되고 5년을 한결같은 정성으로 기도하였으나 산신을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염원이 대종사의 마음에 큰 힘으로 쌓이게 되었고 종교적 인품을 크게 자리잡게 되었고 이러한 지극한 정성에 감동한 부모님께서는 깨끗한 음식을 장만해 주기도 했고 외삼촌 칠산(유건을 시켜 마당바위 옆에 조그만한 초당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다만 주산 송도성의 {대종사 약전}에는 수도실(修道室 지은 내역을 [부친에게 간청하여 전일 기도터인 마당바위에 수도실 한 채를 건축하여 주시기를 의뢰하였다. … 중략 … 곧 수간의 정사를 구성해 주셔서 장차 입택(入宅하려 할 즘에 불행하게도 대종사께서 부친상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이 초막은 대종사 부친상 전전해에 지어줄 것을 간청하여 부친 생전에 이 집을 세웠다. 이 초막은 삿갓집의 형태였으며 부친 별세 당시는 사용하지 아니하다 그 뒤에 사용하게 된다. 이 삼밭재에는 현재 영광군의 협조로 되어진 임로(林路가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일명 개미절터라 하는데 가야암이 개아미절로 변음 되다가 개미절터라 부른 듯 하다. 지금도 이곳엔 기와 파편 등이 흩어져 있고 여기저기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고 넓은 바위가 있는데 크기가 시골집 마당 하다하여 마당바위라 부른다.
탄생가에서 서쪽으로 4킬로미터로 떨어진 구수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종사가 소년시절인 11세 늦가을부터 15세까지 만 4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산신을 만나기 위해 기도를 올린 바위로서, 마당바위 가는 길은 탄생가에서 독다리(영촌과 구호동 사이에 있는 작은 부락를 지나 구호동 뒤 골짜기를 타고 개암골로 들어가면 큰 정자나무 샘터가 나온다. 큰 정자나무 옆에 샘터는 비교적 양지바르고 아늑한 곳으로 대종사 20세시 무렵부터 의식을 돈망하는 때가 많아 주위로부터 폐인의 취급을 받을 때, 구호동에서 살던 부인 양씨는 이 샘터에서 대종사를 위해 지극한 정성을 모으기도 했던 곳이다.
11세 되던 가을 아버지를 따라 선영의 묘소가 있는 군서면 마읍리에 시제를 모시러 갔다가 산신제를 지내는 것을 보고 어른들께 여쭈어 산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집에 돌아온 대종사는 산신을 만나서 사람들이 모르는 모든 문제를 알고 소원을 성취하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대종사는 산신제의 장소를 마당 바위로 정하고 서당에 간다 하고는 삼밭재에 올라 산신을 만나기 위해 정성을 드린다. 산신을 만나려는 염원은 점점 깊어 간절한 기도가 시작되고 5년을 한결같은 정성으로 기도하였으나 산신을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염원이 대종사의 마음에 큰 힘으로 쌓이게 되었고 종교적 인품을 크게 자리잡게 되었고 이러한 지극한 정성에 감동한 부모님께서는 깨끗한 음식을 장만해 주기도 했고 외삼촌 칠산(유건을 시켜 마당바위 옆에 조그만한 초당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다만 주산 송도성의 {대종사 약전}에는 수도실(修道室 지은 내역을 [부친에게 간청하여 전일 기도터인 마당바위에 수도실 한 채를 건축하여 주시기를 의뢰하였다. … 중략 … 곧 수간의 정사를 구성해 주셔서 장차 입택(入宅하려 할 즘에 불행하게도 대종사께서 부친상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이 초막은 대종사 부친상 전전해에 지어줄 것을 간청하여 부친 생전에 이 집을 세웠다. 이 초막은 삿갓집의 형태였으며 부친 별세 당시는 사용하지 아니하다 그 뒤에 사용하게 된다. 이 삼밭재에는 현재 영광군의 협조로 되어진 임로(林路가 형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