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산성지-사적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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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지원기 9년 5월 익산총부(현 중앙총부)가 건설되기 이전, 이 곳에서 대종사를 비롯 12명의 제자들이 김씨 문중의 산제당을 빌어 교리강습을 가졌던 유서 깊고 교단사적인 사적지이다. 만덕산 농원에서 보면 서남쪽으로 3km쯤 떨어져 있는 만덕산 줄기의 7부 능선 큰 바위 밑이다. 큰 바위에 일원상(一圓相)을 그려 표기만 하여져 있고 큰 바위 밑 산제당이 있던 곳은 터만 남아 있다. 이곳은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상달마을 골짜기 만덕산 7부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만덕산 성수면 좌포리의 김승지가 1910년 경에 부종병으로 고생하는 며느리를 위해 지어 준 집이었다. 비단장수 최도화는 미륵사 화주노릇을 하면서 미륵사 넘어 만덕암에 내왕하였다. 그리하여 좌포 김씨들과 알게되어 만덕암 근방에 갈대 초즙으로 산신각을 지어 놓고 공을 드리며 만덕암 관리도 하였다. 미륵산 화주였던 최도화와 정산종사의 만남에서 만덕산은 원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고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에서 첫 훈련을 실시했던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최도화가 관리하는 만덕암에 간 것은 원기 7년 12월경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최도화의 주선으로 만덕산 만덕암에 머무르며 이곳에서 진안지방 교화는 물론 회상창립의 주요 인재를 확보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소태산 대종사 만덕산행에 오창건과 송도성이 수행하였고 만덕암에서 3개월 남짓 머무시는 동안 전삼삼 전음광 모자를 만났다. 소태산 대종사는 익산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가진 뒤 며칠 후에 다시 만덕암에 행가하셨다. 이때 진안 성수군 좌포리에 사는 노덕송옥이 원불교 3대 종법사인 대산종사를 그의 나이 11세시에 대종사와 인연을 맺게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정산종사, 오창건, 김광선, 최도화, 전음광, 박사시화, 이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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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지비만덕산 초선지비는 교단 최초 선을 기념하기 위하여 원기 70년에 만덕산 초선지로 올라가는 만덕산 농원입구에 세웠다. 초선지는 초선지비가 세워진 곳으로부터 2km정도 산위 7부능선에 위치해 있다. 비는 한국 고유의 비석 형태로 거북 좌대에 용의 갓을 씌었으며 비 높이는 좌대로부터 4m이다. 초선지비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서(西)로 약 2천보 만덕산 중복(中腹)에 새 회상의 초선지 산제장터가 있다. 원기 7년 임술 9월 소태산 대종사 부안 봉래산에서 정산종사를 이 산에 보내시어 진안 전등(傳燈)의 기연 지으시고 그 해 섣달 몸소 내산(來山)하시어 석달동안 숙연(宿緣)들을 결속, 새 회상 창립의 주역으로 세우시었다.해를 넘겨 원기 9년 갑자 4월 새 회상을 익산에서 공개하시고 5월 초 이 산에 다시 오시어 열두제자 데리시고 처음으로 한달 선(禪)나신 후 이듬해 기축 3월 총부에서 훈련법을 제정 선포하시니 진안(鎭安) 만덕(萬德)이 새 회상의 만대 사적지가 되었다. 만수 만연 만덕(萬修 萬硏 萬德)이여 제생의세(濟生醫世)의 연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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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미륵사는 만덕산 북쪽 기슭, 진안과 완주 군계에 있는 절로 대웅전과 요사체가 소박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산신각이 새롭게 단장되어 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절이다. 그러나 한때 진묵대사가 주석했다고 전해진다. 전주-진안간 국도에서 약 4km쯤 떨어진 만덕산 7부능선에 위치해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 속한다. 만덕산 농원에서는 능선을 타고 정산에 올라 북쪽 골짜기를 따라 3km쯤 내려가는 거리에 있다. 원기 6년 변산 봉래정사에서 소태산 대종사 정산종사에게 "이제 차츰 때가 되어간다. 어디든지 네 발걸음 내키는 대로 가 보아라. 그러면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전주에는 들리지 말라"라고 하시었다. 정산종사는 스승의 말씀 받들어 전주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가는 도중 한 스님을 만나 길동무를 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간 곳이 바로 만덕산 미륵사였고 그는 미륵사 주지였다. 정산종사와 형제의를 맺고 미륵사 일을 봐주며 그 해 겨울을 나게 되었다. 이듬해 겨울, 설이 지나고 미륵사의 화주였던 비단장수가 미륵사를 찾아왔다. 그때 화주는 정산종사를 보고 마음이 쏠리어 생불님이라 받들기 시작했다. 그 뒤 미륵사에 생불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돌아 불공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정산종사는 더 이상 머물기 어렵겠다 하여 음력 2월경 소태산 대종사께 경과보고의 편지를 보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봉래정사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받고 정산종사는 미륵사를 떠나게 되었다. 이때 화주보살은 정산종사에게 비단옷을 공양하러 절에 찾았다. 그러나 이미 떠나고 없는 정산종사이기에 화주보살은 주지가 정산종사를 다른 데로 빼돌렸다며 대판 싸우기도 하였다. 보살은 결국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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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원만덕산 초선터가 성적지로서 관리되기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원기 15년 소태산 대종사의 권장으로 이공주 교무가 임야 50정보를 매입하였다. 그리하여 이준경 이보국 정일지 전일구 이재문 등이 총부에서 파견되어 [홍곡당(洪谷堂)]을 짓고 감나무 등을 심는 등 산전 개간을 하며 약초를 캐다 팔면서 간고한 생활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원기 29년 중길리 상달에 사는 최내선 교도가 홍곡당에서 간간히 법회를 보다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불법연구회 중길리 출장소]간판을 붙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기 32년 상달마을에 불이 나 교당도 전소되어 산전개간과 마을교화의 꿈이 깨어지고 말았다. 그후 마을법회도 중단되고 농원도 지킬 사람이 없자 최내선 교도 가족이 이사와 살았다. 6.25 이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 교당도 없는 상태에서 농원을 팔자는 의견 등 많은 의견이 분분할 때 동전주 교당 백낙천 교도가 만덕산 농원 개발에 서원을 세워 원기 52년 법당겸 숙소를 짓고 만덕산 전체가 참나무임을 보고 표고버섯 재배를 계획했다. 그후 원기 58년 양제승 교무가 부임하여 긴 세월을 땀과 혼으로 가꾸어 왔다. 만덕산 농원의 주 생산품인 표고버섯은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한 고랭지로 표고버섯 재배가 적격이다. 양제승 교무는 농원 운영을 영육쌍전에 바탕한 산업훈련 도량화 하였다. 원기 68년에 훈련원의 면모를 갖추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후 예비교역자 전지훈련 등 동하선으로 만덕산 초선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만덕산 농원은 표고버섯을 비롯하여 각종 자연식품을 생산하여 오닥 최근 영농법인을 설립하여 만덕산 푸른 생명 효소 등 많은 건강 식품을 개발하여 시판하고 있다....